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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진로교육] 성동기 교수의 책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작성자 : edulab1( )   조회수 : 628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역작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통사 중심

-2,500여 년 동안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다.독특하지 않으면서 독특한 역사를 가지다.

 

1장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만든 주요 요인

 

1. 직선으로 그어진 국경선의 의미

 

우즈베키스탄의 서쪽과 북쪽 일부 국경선은 직선이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을 있게 한 이 직선의 국경선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보자.

 

1) 첫 번째 비밀 - 기후

 

우즈베키스탄은 북위 37도와 북위 45도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6·25 전쟁 이전 북한과의 국경선을 38도선이라 불렀는데 우즈베키스탄은 북한의 끝 위도(43)와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기후는 우리와 많이 다르다. 고온 건조하여 겨울엔 한국처럼 매서운 추위도 없고 여름엔 무덥지도 않아 주변 국가들과는 달리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데 아주 좋은 곳이다.

 

2) 두 번째 비밀

 

천산산맥에 의해 만들어진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두 강은 우즈베키스탄의 동서를 관통하며 사막과 황무지로 덮힌 주변 국가와는 달리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 풍부한 농작물을 생산하게 한다. 특히 두 강의 지류는 우즈베키스탄 영토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사가 가능하다. 주변 국가들은 우즈베키스탄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부러워한다(아무다리야 강을 트랜스옥시아나라고 부른다). 강대국들이 이땅을 왜 차지하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두 강은 우즈베키스탄 국장(國章) 한 가운데 양쪽으로 또렷이 그려져 있다.

 

3) 세 번째 비밀 목화와 맛 좋은 과일

 

목화는 고온 건조하고 수량이 풍부한 곳에서 잘 자란다. 우즈베키스탄은 목화 재배의 최적지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19세기 말 대영제국은 우즈베키스탄의 양질의 목화를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우즈베키스탄 대부분의 영토를 목화밭으로 바꾸고 생산된 목화를 자국민을 위해 가져갔다. 그리고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강의 물과 고온 건조한 기후에 강렬한 햇살을 받은 우즈베키스탄의 과일들은 당도가 높아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4) 네 번째 비밀 실크로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아시아와 유럽 대상들의 휴식처이자 정보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었으며, 또한 중동 여러 나라와 유럽,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사통팔달의 역할을 하였다. 실크로드 중앙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은 동서양의 문명을 융합시키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역을 했던 우즈베키스탄은 동서양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불행한 역사를 만든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2장 우즈베키스탄 역사의 주체

 

현재 인구에 관한 통계 부재

 

1991년 독립 이후 단 한 번도 국가 차원의 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2017년 우즈베키스탄 통계청과 UN이 발표(30,3000,000)하는 우즈베키스탄 인구(31,575,300)는 백만 명 이상 차이가 난다. 두 자료 다 정확하지 않고 대충 그 정도이다로 통한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독립 이후 인구수를 소비에트연방 정부의 자료를 기반으로 했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은 120여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각 민족별 인구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그들은 16세가 되면 여권을 발급받게 되는데 거기에 자신의 민족을 선택하여 적을 수 있다. 대부분 그들은 부계 민족을 선택한다. 우즈베크족이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의 82%라고 해도 반드시 그들이 같은 혈연적·종족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우즈베키스탄의 정확하지 못한 인구수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이것이 독립 이후 본국으로 귀환한 우즈베크족과 여권에 민족 기재 방식으로 인하여 증가한 법적 수치 때문이지 아니면 순수한 증가이지 세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식적인 인구조사가 절실하다. (참고로 20211215일 우즈베키스탄 유아교육부 신 아그리피나(SHIN Agripina)장관의 본교 방문시 제작된 영상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인구수가 33,500,000명으로 나온다.) 

 

2. 우즈베키스탄 내 우즈베크족의 점유물에 관한 논쟁

 

우즈베크16세기 초,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인 샤이바니칸(1415~1510)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남하하여 이곳을 지배할 당시 함께 따라 내려와 정착한 소수의 무리들로 지금의 우즈베크족과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다. 하지만 소수였던 그들이 현재 82%의 우즈베크족을 만들었냐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들이 남하하기 전부터 이곳은 우즈베크와는 다른 집단들이 다수를 이루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82%를 뺀 18%만이 처음부터 우즈베키스탄 영토 내에 살았던 순수 우즈베크들이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82% 영토 내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우즈베크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 의문을 다음에서 알아보자.

 

3. ‘우즈베크라고 불린 사람들의 역사적 기원

 

함달라흐 카즈비니의 저서 타르히 구즈다라는 책에 의하면, ‘우즈베크라는 말은 1335년 일칸국(오늘날의 이란 지역)을 침입한 킵차크칸국의 군대를 설명하는 과정에 우즈베크인들’, ‘우즈베크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우즈베크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킵차크칸국과 일칸국은 칭기스칸(1162~1227) 사후 몽골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사칸국(四汗國) 중 하나다. 킵차크칸국은 흑사병의 유행과 우즈베크칸의 후계자 자니베크칸이 1357년 암살당하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해 당시 강성했던 러시아 제후 연합군과 리투아니아 군에게 연달아 패하면서 1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카잔칸국, 크림칸국, 아스트라한칸국, 우즈베크칸국, 카자흐칸으로 분리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우즈베크인들’, ‘우즈베크의 나라라는 표현을 해석하면, ‘우즈베크칸을 추종하는 사람들’, ‘우즈베크칸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의미이다. 우즈베키스탄이라는 국명은 결국 당시 지배자(군주) 우즈베크칸(1282~1341)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한()은 칸(khan)이라 읽고 군주를 의미한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의 역사학자, 미국의 역사학자 등은 우즈베크칸과 우즈베크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백호르드(White Horde)가 아미르 티무르(Amir Temur, 1336~1405)에 의해 패배하고 난 후 혼란기를 틈타 15세기 초에 이 지역에 등장한 소규모의 독자적인 세력들 중의 하나가 우즈베크라고 한다.

현 우즈베키스탄 역사학계의 주장은 어떨까? 그들은 다음과 같은 별도의 세 집단이 통합되어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우즈베크족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42). 16세기 초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다쉬트 킵차크의 유목민 집단, 차카타이(칭기스칸의 둘째 아들)와 오구즈(터키의 전설적이고 칸) 투르크에 속하는 다양한 부족 및 씨족들과 연관성을 가지는 투르크화된 자들의 집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타지크(타지키스탄인) 정주민이었던 사르트라고 불린 집단이다.

우즈베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우리가 공통적으로 우즈베키스탄 민족을 이해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46). 우즈베크라고 불린 사람들은 혈연적·부족적 관점의 집단이 아니다. 우즈베크가 투르크화된 혹은 투르크-몽골이라는 집단으로 구성된 집단이다. , 그들은 우즈베크를 중심으로 다수의 집단들이 1, 2차 통합된 집단이다.

  

4. 과거 우즈베크와 현재 우즈베크족의 연관

 

우즈베키스탄 학계는 16세기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남하한 우즈베크와 현재의 우즈베크족을 동일한 존재로 본다. 이 사실은 16세기 이전까지 중앙아시아에는 이미 페르시아계 집단, 투르크계 집단, 그리고 몽골계 집단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공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았다. 이처럼 다양한 집단들이 형성된 후 우즈베크가 지금의 우즈베케스탄으로 남하하여 이곳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추측이 우즈베키스탄 학계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우즈베크는 혈연적·종족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단지 더 강력한 집단에 복종했을 뿐이다.

분명히 집고넘어갈 일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인구의 82%를 차지하는 우즈베크족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82%일까이다. 그 해답은, 1917년 레닌이 이끈 러시아혁명 과정 중에 중앙 아시아에서도 무력으로 과거의 칸국을 되찾으려는 바스마치를 중심으로 무장저항이 결렬하게 일어났다. 이 기간은 우즈베크의 힘에 의해 통합되었던 다양한 집단들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레닌에 이어 집권한 스탈린은 중앙아시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통제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 건국한 투르키스탄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1918~1924)’을 여러 개로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1924년부터 민족분포에 따라 국경을 정하고 공화국 명을 정해주었다. 이때 부하라, 히바, 코칸드 세 칸국은 스탈린의 지지(우즈베키스탄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명을 부여받음)를 받은 우즈베크로부터의 독립이 좌절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스탈린은 레닌과는 달리 소수민족탄압정책을 펼쳐 모든 민족이 소비에트연방 국민이 되도록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연히 우즈베크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집단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을 우즈베크화하는 것이었다. 일련의 과정은 1991년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면서 독립국가의 주류민족으로서 우즈베크를 국내외적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우즈베크라는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16세기에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남하했던 우즈베크가 이 나라 전체 인구의 82%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52). 

 

5. 민족 개념 이론을 통한 우즈베크의 민족정체성----계속...........

 

<참고문헌>

 

성동기(2021).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서울: 도서출판 써네스트.

Abdushukurov Olimjon(2018). 우즈베키스탄 문화의 역사적인 발전과 독립 후 한국과 문화 교류 현황 연구. 중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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