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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정학] 공교육제도의 형성
작성자 : Edu연구소1   조회수 : 1660

공교육제도의 형성

 


공교육제도는 일반적으로 국가 혹은 준국가적 자치조직의 통제와 관리와 지원에 의해서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운영되는 교육제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세계교육에서 이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약 이백년 전의 일이며, 우리 사회가 현재의 제도를 시행한지는 거의 백년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에는 약간의 다양성이 있어 왔다. 한 때 사교육체제를 선호하던 영국의 상류사회가 자녀들을 가정에서 교육하던 것을 그만두고 공동으로 새로운 학교를 세워 공립학교”(public school)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교육제도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늘의 통념에 비추어 볼 때 그 학교는 사립학교이며 국가 혹은 자치정부의 통제나 지원을 받는 학교는 아니었다.

동서양의 교육사에서 국가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학교제도로서 오늘의 제도와는 그 유형이 다른 일종의 공교육제도가 있었다. 그러한 국립학교 혹은 공립학교의 형태는 서양에서보다는 오히려 동양의 고대국가에서 일찍이 발달해 있었다. 중국의 고대 삼국시대(, , )부터 학교제도가 있었고, 당시의 학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관료의 양성을 위하여 운영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킨 통일 국가인 진나라와 한나라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발전시키면서 교육도 국가관리의 상태에 둔 이래, 중국은 아편전쟁 후에 서구적 제도를 도입하기까지 전통적인 교육체제를 유지해 왔다. ()나라와 당()나라 이후에는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와 연결시켜 일종의 국가적 교육제도를 운영해 왔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고구려의 소수림(小獸林王) (372) 그것의 초기적 형태를 도입하였으나, 조선조 말기까지 이어진 교육제도는 통일신라의 신문왕(神文王) (682) 이후의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교육의 기회를 특수계급에 한정해서 제공하였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공교육제도라고 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의 교육제도, 18세기의 독일에서 실시한 교육제도 등과 같이 국가가 통제하고 운영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제도적 동기가 부국강병의 장치로서 운영된 것이었기 때문에 교육기회의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적 공교육제도의 한 유형에 속한다고 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현대적 공교육제도의 모체는 프랑스 혁명의회에서 입안되고 제정된 교육제도라고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전개된 평등사상이 평등교육의 실천을 촉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당시에 프랑스의 제도적 교육을 주도한 예수회(Jesuit Society)의 종교적 교육에 저항한 루소(Jean Jacque Rousseau), 라 샤롯떼(L.C. la Chalottais), 꽁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등의 세속교육적 제도의 구상이 공교육제도를 계획하고 운영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충분히 성숙시켰다. 말하자면, 그것은 교육의 주도권을 종교로부터 국가로 옮기는 일이었으며, 소수의 특권계급을 위한 교육에서 국민대중을 위한 교육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환과정에서 1789년의 대혁명 이후에 논의되어 오던 공교육제도는 종교단체의 반발과 귀족주의적 전통의 저항, 그리고 여러 가지의 시행착오적 과정을 경험하다가 19세기의 초기에야 나폴레옹의 추진력을 입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공교육제도의 발달과정에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 우선 우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독일이 독일민족의 정신적, 물질적 부흥을 기하기 위하여 국가 주도하의 교육을 구상하여 실시한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피히테(Johann G. Fichte)와 훔볼트(Friedrich W. von Humboldt) 등의 지도력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었다. 독일의 공교육제도는 사회적 동기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평등주의적 시민정신을 실현코자 한 프랑스의 경우와는 다소 달리 강한 민족주의적 동기에 의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범국민적 사업으로서의 교육을 제도적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현대적 공교육제도의 기초를 성립시켰던 셈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의 여러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교육에는 평등주의의 사상과 민족주의의 사상이 제도적 이념의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의 공교육제도에는 그 자체의 형성과 존속과 효율을 위하여 관료체제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대혁명의 직후에 꽁도르세의 것을 포함하여 학교제도의 여러 가지가 프랑스 의회에 제안되었으나, 혁명후의 혼란으로 인하여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는 안정된 정치적 힘이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집권이 시작되면서 종래의 우유부단하던 교육정책이 적극적인 힘에 의해서 추진되었고, 정규의 교육제도에 체제적인 기초가 형성되었다. 나폴레옹은 종교단체와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교육의 획일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1806년에 제국대학부”(Imperial University)를 설치하여 제국 전체의 공교육 활동을 관장하는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는 제국대학부의 장이 허가하지 않은 어떤 교육기관도 설치할 수 없게 하였으며, 제국대학부의 구성원으로서 그 대학부로부터 학위를 획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학교를 세울 수도 없고 교원이 될 수도 없게 하였다. 대학과 전문학교에서 실시되던 고등교육은 지역 아카데미로 개편하여 각각은 교육장의 감독을 받게 하였다. 프랑스의 전역에 걸쳐 모든 교원은, 특히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에 엄격히 적용한 것이지만, 국가가 수여하는 자격증을 소유해야만 교직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프랑스는 완전한 국가통제의 공교육제도를 성립시켰다. 나폴레옹이 권력에서 축출된 후에 프랑스의 교육은 다소 동요를 겪었으나 그 골격은 여전히 남게 되었다.

독일의 홈볼트가 성취한 교육개혁도 관료체제의 도움에 의한 업적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Friedrich Wilhelm III)는 나폴레옹에 의해서 잃어 버렸던 물리적 힘을 이지적 힘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육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의 독일(Preussen)은 큰 도시와 산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중앙과 지방의 공직 자리가 중산층의 사람들이 진출할 수 있는 주된 고용기회였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공직에서의 능력주의는 교육에 대한 필요를 창출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18세기의 초기에 인문주의가 사양하면서 함께 기울어져버린 대학을 복원시키고 인문학의 중흥을 중등학교와 대학의 교육에서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베르린 대학은 유럽 최초의 세속적 대학교육기관이었다. 초등교육은 국민학교”(Volksschule)와 진학을 위한 준비학교로 표준화하고 후속해서 교원양성을 위한 교육기관도 설립되었다.

한국의 공교육제도

이러한 배경과 함께 전개된 서구식 공교육제도를 우리 나라에서 시작한 한 것은 조선조 말기에 소위 갑오경장”(1894)에 의해서 진행된 사회적 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기독교의 선교단체들에 의해서 서구식 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정부도 육영공원등의 새로운 학교를 설립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학교에 불과한 것으로 현대적 공교육제도의 전면적 출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정부는 종래의 학교제도를 관장하던 예조(禮曹)를 없앤 후에 학무아문(學務衙門)을 두어 국가의 교육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이와 동시에 학교제도와 연결되어 있던 과거제도를 폐지하였다. 학무아문은 고시를 발표하여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세울 것을 예고하고, “위로 공경대부의 아들로부터 아래로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모두 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는 평등교육의 실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고종 황제는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를 내려 새로운 교육제도의 출발을 보게 되었으며, 후속해서 소학교와 사범학교의 설립에 관려된 법규를 포함하여 각급학교의 관제와 규칙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정부는 교육의 제도적 체제와 활동적 내용을 개혁하는 데 있어서 우선 사회의 다른 조직과 심각한 마찰을 경험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통적 교육제도가 과거제도와의 연계되어 거의 전적으로 국가의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서양의 종교단체처럼 교육의 주도권을 두고 발언권을 행사할 저항적 집단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교육제도의 전통 속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관료체제는 사회 전반의 개혁에 맞추어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시행과 추진을 용이하게 하는 기본적인 여건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주의자들과 기독교의 선교단체들이 국가주도로 설립된 학교와는 달리 사립학교들을 세워서 운영하기는 하였지만, 이 학교들은 관립학교에 대한 대안적 교육기관들이지 제도적 교육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한 세력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일제 시대에는 교육의 운영권이 식민지 통치체제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중앙집권적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조 말기의 정부가 중앙통제적 힘으로 사회개혁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전통적 학교제도와 교육내용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일을 일시에 단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일제의 식민지 통치체제도 한국인의 학교제도와 교육내용을 그들의 통치 목적에 맞게 운영하기에 매우 용이한 조건을 장악하였다. 어떤 학교를 세울 것이며, 어떤 대상을 교육할 것이며,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이며, 어떤 의식과 사고를 하는 인간을 기를 것이며, 그리고 어떤 교육을 금지할 것인가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제국주의적 관료체제가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광복 이후에 전통적인 교육의 중앙통제적 체제는 미군정(美軍政)의 교육담당 고문관들이 교육자체제도를 강력히 권장함으로써 다소 이완될 수 있는 계기를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헌법에 보장된 지방자치제도를 근거로 하여 교육자치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1949년의 교육법에서 마련되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가 6.25 동란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어 그 실시가 지연됨으로 인하여 교육자치제도도 함께 미루어졌다. 그 후 1952년에 교육법 시행령이 공포에 이어 처음으로 교육자치제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주로 초등교육에 한정된 것으로 시.군 단위의 자치제도였으며 중등교육은 자치권의 범위밖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에 출범한 제2공화국은 자치 구역을 기초적 자치단체만이 아니라, 광역적 자치단체를 두고, 단체장을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등의 자치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개편체제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교육행정의 비능률성, 교육재원의 낭비, 민도의 후진성이 그 이유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의 군사혁명정부는 교육행정을 지방행정의 체제에 통합시켰다가 1963년에 교육자치제도를 명목상으로 부활시켰다. 교육위원과 교육감은 사실상으로 임명되었으며, .도별로 설치된 교육위원회와 그 산하에 있는 교육청은 자체조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앙통제적 행정체제의 하부구조에 불과하였다.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치권도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방행정으로부터의 교육행정의 자율권도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1991년에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와 함께 실질적 교육자치제도의 부활을 보게 될 때까지 단지 부분적인 손질밖에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실질적 교육자치제도의 부활이라고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기초단위와 시도단위의 교육위원회의 구성과 각급 자치단체의 교육장이 선출된다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자치단체는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실정이고, 각급학교의 교육과정과 교원정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법규들은 중앙통제적 체제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공교육제도의 의의와 한계

공교육제도가 채택되기 이전의 한국과 중국의 경우에 제도적 교육은 주로 국가의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와 연계된 것으로서 그 기회가 오직 귀족계급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졌으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는 주로 교회의 손에 의해서 운영되면서 그 기회는 종교계의 지도층과 귀족계급의 자녀들에게 주어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교육제도는 소박한 평등교육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평등교육의 철저한 의미와는 아직 먼 거리에 있는 형식적 교육기회의 평등한 제공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뜻에서이다. 동양사회에서는 전통적인 반상제도와 과거제도의 철폐 등과 같은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되면서 제도적 교육기회의 대중화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으며, 서양의 경우에는 교육의 세속화를 또한 수반하였다. 동양사회는 사회와 교육의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계층구조적 측면에서는 적어도 형식상 체제의 일원화를 기한 셈이다. 반면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비록 제도적 교육의 기회를 서민계층에도 제공하기는 하였으나, 학교교육이 계층의 구별을 탈피하고 적어도 형식상 통합된 제도로 일원화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교육제도는 그것의 제도적 성격에 있어서나 그것의 사회적 기능에 있어서 평등사회의 실현에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해 왔다. 우선 자기성장을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경제적-문화적 요인에 의하여 여전히 교육부문의 소외계층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일정한 기간의 형식적 교육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으며, 보장되지 않은 상급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획득을 위하여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그리고 문화가치의 평가에는 다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종래에 귀족계급 혹은 상류사회가 누리고 있던 체계적인 지식과 세련된 예술 등의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은 기회가 사회의 구성원 전체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육을 수단으로 하는 사회계층이동의 폭은 수직적(지위)으로나 수평적(집단)으로나 크게 확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만을 들고서도 공교육제도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사회적 가치와 경험의 획득 혹은 배분에 차등주의적 구획을 한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데 어느 다른 제도적 부문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교육제도는 그 체제를 국가의 총체적 계획 속에서 전개되도록 함으로써 한 국가가 추구하는 공통의 이념적 노선과 문화적 중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구성집단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 데 기본적으로 요청되는 의식과 신념의 기반, 그리고 방법적 원리를 공유하게 하는 데 대단한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기가 어렵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교육의 보편화를 기한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더 심화된 경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도 잠재된 갈등적 요소의 노출에 불과한 것이지 교육이 그러한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국가는 공교육제도의 운영을 통하여 각 부문에서 필요로 하는 체계적인 사회적 충원을 하는 일이 용이하게 되었고, 위기에 처하였을 때 국가적 기동력을 발휘하고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통제의 능률적인 장치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공교육제도가 국가와 구성원들에게 발휘한 이러한 기능은, 한편으로 교육이라는 활동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형성하고 변화시킨다는 본질적 성격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교육활동을 운영하는 국가적 체제가 발휘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한 기능은 공교육제도의 정착과정에서 제도적 형태의 교육을 국가가 독점하여 강력하고 광범한 힘으로 성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에 따라서 그 경직성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국가관리는 교육활동을 획일화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구화하고 타율적인 힘의 작용을 용이하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오늘의 공교육제도는 인간의 댜양한 개성의 신장과 자유로운 성장을 주장하는 낭만주의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와 문화특성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서 작용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으며, 획일주의의 지배로 인한 실질적 교육기회의 정의로운 배분을 어렵게 한다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저항을 받고 있다. 이러한 불만과 비판과 저항은 오늘의 공교육제도가 지니고 있는 질병의 여러 측면이 노출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병이 공교육제도 자체가 지닌 내재적 특징에도 다소 취약성의 일면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러 사회적 세력들이 이 제도가 지닌 효용성을 이용하거나 독점하기 위하여 다툰 결과 그 힘의 작용이 뒤엉켜버렸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기도 하다. 어느 세력이 강한 힘을 발휘하여 독점해 버리면 겉보기에 평온한 것 같지만 다른 세력은 항상 불만에 차 있고, 그 독점적 세력은 교육의 본질을 보호하고 성숙시키려고 하기보다는 그 세력이 추구하는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철저하게 교육의 효용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공교육제도는 어느 세력이든지 제대로 장악하기만 하면 별 저항없이 여러 가지의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조건이 바로 공교육체제에 편승해 있는 관료체제이다. 교육의 국가관리는 자연히 그 규모를 대형화하였고 대상집단의 성격과 욕구의 이질성과 다양성은 교육가치의 구조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규모의 대형성과 구조의 복잡성은 자연히 이를 합리적으로 능률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제적 원리를 필요로 하였고 그것이 바로 관료체제이다. 그러나, 관료체제는 통제력의 중앙집중을 기하고, 실제적 복잡성을 단순화하며, 목표달성을 겨냥하는 기계적 체제를 운영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고, 그런 성향이 교육의 독특한 성격에 적응하지 못할 때 온갖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관료체제는 유용한 사회적 도구이다. 관료체제는 주어진 목적의 실현과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조직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구조적으로 복잡한 과업을 능률적으로 처리해내는 운영의 원리이다. 현대사회에서 거의 모든 조직은 이러한 관료체제적 원리를 다소간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관료체제적 원리가 교육, 특히 공교육제도를 일차적으로 지배해버리면, 그것의 도구적 효용성이 교육의 특성을 결정해 버린다. 그것은 어떤 목적에 봉사하느냐에 따라서 교육의 본래적 특성이 보호를 받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예컨대 교육부문 이외의 어느 세력에 의해서 강하게 장악되어 버리면 교육은 철저하게 그 세력의 도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관료체제적 효용성에 미치는 사회적 힘의 구조가 복잡하여 혼란이 발생하면, 교육은 이리저리 분방하게 되고 방향감을 잃고 만다.

현실적으로 오늘의 우리 교육은 그 제도적 형식과 활동을 두고 볼 때 커다란 하나의 학교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각급학교는 국가의 중앙정부가 정한 규칙에 따라서 설립되어 있고, 학교마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은 국가적 수준에서 결정된 학제와 교육과정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으며, 거기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원들의 자질도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서 규정되고 있고, 소요되는 교육경비도 국가적 기준에 따라서 조달되고 있다. 말하자면 제도적 교육은 완전히 국가의 독점적 상태에 있다. 이러한 학교가 마련해 주는 획일적 삶의 방식 이외에는 누구도 스스로 선택한 삶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지가 않다.

국가의 관료적 체제가 제도적 교육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 체제만 장악하게 되면 교육은 쉽게 그 힘에 봉사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교육체제를 주도하는 세력이나 거기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다른 세력들은 각기 달성코자 하는 현실적 목표나 장기적 과제를 교육의 힘을 빌어 관철시키고자 한다. 특히 교육은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기가 용이하여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이나 이에 저항하는 집단은 그 체제 운영의 주도권을 지키고자 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보이기가 쉽다.

교육이 극도로 도구화되어 있고 그 도구적 성격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으면, 교육활동의 질은 그 세력이 정하는 기준에 의해서 결정되고, 그 세력이 추구하는 목적에 봉사하기를 요청받게 된다. 교육체제는 타율적 통제하에 있게 된다. 이런 체제하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면 그들의 활동과 업적도 그들의 전문직적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재적 세력이 정한 기준에 의해서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 전문직자들이 봉사해야 하는 고객집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직업적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은 것이 된다. 말하자면, 직업적 무력성과 나태성은 강력한 관료주의적 체제에 의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반면에 그들이 고매한 직업적 사명감과 탁월한 전문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가 않는다. 왜 교육해야 하며, 무엇을 가르쳐야 하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어떤 인간으로 육성시켜야 하는가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그들의 전문성이란 주문된 상품의 기계적 생산에 불과한 것이 된다(이돈희의 글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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