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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철학 및 교육사] 반려, 반려자 그리고 반려동물
작성자 : edulab1   조회수 : 591

반려, 반려자 그리고 반려동물

-몽테뉴의 <수상록>에 대한 솔 프램튼의 생각-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는 여행을 좋아했다. 그는 각국을 여행한 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미세한 경험을 그 나라의 언어로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늘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라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톡톡 튀는 재치와 지혜를 담아 20여 년 동안 에세이 형태로 기록했다. 그런 경험을 다양한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이 그 유명한(여기서 유명하다고 한 이유는 다른 수상록에 비해 창조적이고 적극적이며 삶의 긍정적인 가치를 듬뿍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이다. 그는 자질구레한, 그러나 그에겐 한순간도 놓치기 아까운 일상의 경험에 배율 높은 현미경을 들이댄다. 그가 관찰한 미시적 주제는 우정, 죽음, 회의(의심), 동물, 전쟁, 여행, 고통, 섹스, 관계, 취향, 유년, 자아 등이다. 재미없고 유익하지 않으며 공감되지 않는 글이 없지만 특히 동물에 관한 몽테뉴의 경험담을 소개할까 한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동물을 자신의 기분을 조절하는 도구쯤으로 여긴다. 이처럼 우리처럼 동물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나라는 아직 많다. 하지만 동물을 인간과 공존의 존재로 여기는 나라는 더 많다. 그들은 이들을 반려동물이라고 부른다. 반려(伴侶, partner, mate)란 짝, 친구의 의미이다. 반려자는 배우자를 비유적으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천만 가정에서 키우는 동물은 더 이상 인간 욕망의 수단도 도구도 아니다. 그들도 인간들의 권리를 공유할 수 있는 위치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soul)은 인간과 동물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솔 프램튼의 책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를 통해 몽테뉴의 동물에 관한 미세한 경험과 그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살펴보자. 몽테뉴는 법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마을로 돌아왔다. 이 시골 귀족의 집에는 언제나 닭과 말의 울음소리와 쥐가 바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양계장을 들여다보면서 수탉이 언제 우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신장결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키우던 말을 타며 잠깐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훌륭한 학자라고 불리기보다는 멋지게 말을 타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몽테뉴는 언어도 없고 인간의 언어를 이해 못하는 동물을 기계로 본 데카르트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동물들에게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말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서 그 개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경계하기도 하며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들도 서로 친밀감을 표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물들은 동작으로 대화와 담론을 나눈다.”

몽테뉴는 제비를 관찰한 결과, 제비들은 “어린 새끼들이 폭신폭신한 이끼 위에서 연약한 다리를 편안하게 뻗을 수 있도록” 배려할 줄 알았다고 썼다. 그는 또 ‘꿀벌 사회만큼 질서가 있는 사회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몽테뉴는 동물들에게도 “학식과 지혜”가 있다고 했다. 거북이는 향신료로 쓰이는 마조람(majoram, 지중해에서 나는 상큼하고 달콤한 레몬향의 향신료)으로 자신의 몸을 씻고, 황새는 바닷물로 관장(배변 촉진 행위)을 하며, 코끼리는 자신의 몸에 박힌 것은 물론 주인의 몸에 박힌 화살과 창을 뽑아 준다. 동물 관찰을 통해 몽테뉴가 얻은 교훈은 인간의 습관적인 오만, 즉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사고방식 자체야말로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세(중세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동물들을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인간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었다.)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기원전 460?~기원전 370?)에 따르면 인간의 많은 능력 중에는 동물에게 배운 것들이 많다. 바느질은 거미에게, 집 짓는 기술은 제비에게, 노래 부르는 것은 꾀꼬리에게 배웠단다. 날씬하게 균형미가 잡힌 자태를 보면 물고기는 인간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생겼다. 따라서 인간의 우월감은 인간의 허황된 상상이 빚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몽테뉴는 죽기 몇 년 전 <수상록> 최종판에 주석을 달 때 동물을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한, 동물에 대한 그의 자세를 대변하는 글을 덧붙였다. “고양이와 놀고 있을 때,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사물의 절대 평등을 호접지몽(胡蝶之夢: 장자는 꿈에서 자신이 나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나비가 자신이 된 듯한 경험을 하게 된데서 유래된 말)으로 대변했던 장자의 철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몽테뉴는 지금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과연 우리가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있다면 짐승, 즉 동물들도 매우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만도 못한 우리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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