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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 · 인성교육 기초이론] 아동권 - 아동학대처벌법과 아동권리와 복지
작성자 : edulab1( )   조회수 : 433

아동권

아동학대처벌법과 아동권리와 복지

아이의 감정과 세계

 

망가진 인형 때문에 흘리는 눈물과 좀더 자라서 친구를 잃고 흘리는 눈물은 둘다 차이가 없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든, 우리 인생에서는 결코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슬퍼하는가이다. (중략...) 아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결코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작지도 않거니와, 때로는 어른들이 흘리는 눈물보다 훨씬 무겁다.-에리히 캐스트너, 하늘을 나는 교실-

 

어른들은 자신의 감정이 고뇌와 깊은 사유를 거쳐 터져 나온 것이라고 평가절상하고 아이들의 감정은 일차적 욕망의 표출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한다. 감정 표현의 과정을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어른들과는 정반대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차병직, 2020). 아이들은 말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감정이 있고, 우리들만의 세계가 있다고. 어른들이 반드시 거쳐 온 그 세계가...

 

어른과 아이는 동일한 세계에서 산다. 하지만 서로의 정신이 닿는 환경은 다르다. 그래서 아이가 구성하는 세계와 어른의 경험으로 구성되는 세계는 다르다. 아이와 어른은 같은 세계에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산다. 모든 존재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이유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어른들은 종종 자신의 아이 시절을 잊듯 현재의 아이들의 존재와 그들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중세의 어른들은 아동을 자신들의 축소물로 생각했다. 인권의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시각은 아니었다. 아이를 노동력의 일부로 생각했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을 그 작디작은 몸으로 해야만 했다. 전쟁에 나가는 것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어른 나이에 자신의 키보다 큰 창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역사를 우리는 안다.

 

아이는 아이들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른의 소유물로 어른 사이에 생존할 뿐이었다. 아이는 사람과 동물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존재로 믿었다. 어릴수록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깝고 자랄수록 점점 사람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다. 태어나는 순간 이성은 완전히 결여된 상태인데 성장하면서 이성을 갖춘다고 보았다. 이성의 유무에 따라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였다(차병직, 2020).

 

어른이 되기 위해 훈련받는 시간

 

아이는 작은 어른이고 작은 어른은 제대로 된 큰 어른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했다. 훈련을 받는 아이는 훈련을 하는 어른의 소유물이었으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훈련은 주로 개으름에 대한 체벌의 정당화 명분이었다. 아이는 자라서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훈련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훈련의 전후에 당연히 체벌이 동원되기도 했다. 

 

소유의 대상에서 교육의 대상으로(370)

 

시대와 공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경제 구조 변천에 따라 공동체 중심의 삶이 부부 중심의 가족으로 바뀌면서 아이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아이가 자라서 자신과 같은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일은 아이가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보호도 훈련도 아닌 교육이란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그와 함께 아이 나름대로의 독자성도 조금씩 인장하게 되었다. 어른이 되는 동안 아예 방치되거나 아니면 훈련 또는 과보호의 대상이었던 아이가 서서히 교육의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라는 전문 기관이 생겼다. 아이의 교육을 전문 교육 기관에 완전히 떠맡김으로써 교육은 전문화되고 부모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학교의 등장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첫 번째는 학교에 의해서 비로소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란 개념이 성립함과 동시에 아이는 교육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미래는 결국 어른이 하기에 달렸다는 교육관이 탄생하였다.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영혼을 가진 찰흙이었다. 원하는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373).

 

학교는 아이들을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장 또는 공장처럼 비친다. 아이들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교사는 체벌을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삼았다. 아이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체벌로 인한 서로의 고통 따위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이전에는 아이를 찰흙 주무르듯 주조하여 사회에 필요한 인간으로 만든다는 숭고한 과정을 미처 몰랐다는 듯이 교육을 빌미로 아이에 대한 어른의 자의적 행동이 일상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교육의 목적으로 폭력이 정당화되기에 이르렀다.

 

성적 중심 학교, 모든 불화의 원인

 

아이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학교 교육에서 비롯한다. 가정은 학교에 보내기 위한 예비적 또는 보조적 교육만 담당하게 되었다. 아이의 교육을 학교에 전적으로 맡기면서 일어나는 아이들의 첫 번째 인권 문제는 체벌 또는 폭력이다. 학교는 교육의 전문기관이고, 전문기관으로서의 권위를 지녔기에 부모들의 간섭을배제할 수 있다. 아이들은 교육이라는 숭고한 행위로 만들어가야 하는 대상이므로 교사는 어떻게든 설정된 교육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인내심을 잃고 목표에 집착할 때 가장 쉽게 들고 나오는 것이 체벌이다.

 

교육 과정에서 생기는 폭력은 아이들의 인격을 침해한다. 교사의 폭력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한 그 대상인 아이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어떠한 형태로든 위력을 행사하는 체벌이나 폭언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생각을 양극단으로, 그 사이에서 용인할 수 있는 사람의 매질의 경계가 어디냐를 따진다. 체벌을 금지하려는 분위기 때문에 교권의 실추 또는 침해가 거론된다. 교육에서의 교권의 확립도 중요하겠지만 교권의 침해를 학생의 권리와 충돌하는 교사의 인권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교권의 침해는 학부모와 교사 사이에서 비롯하는 문제이다.

머무는 시간으로 보나 삶을 채우는 내용으로 보나 아이들에게는 가정보다 학교가 비중이 더 높은 공간이며 장소이다. 인간 존재는 태어나 초기 인격을 형성해 가는 곳이다. 집 밖에서 행해지는 모든 교육의 장소를 학교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제도 교육이든 사교육이든 모든 형태의 교육이 행해지는 곳을 학교라고 하면, 가정은 그야말고 개별 기숙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인권 문제가 발생하거나 기인하는 장소는 대부분 학교다(377).

 

문제가 학교에 일어난다면, 그 문제가 중대한 것이라면,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성적에 있다. 보호자들 역시 교육의 취지를 잘 알면서도 최종 관심은 성적이다. 성적 중심의 학교생활은 모든 불화와 불행의 주범이다. 가정 이상으로 편안하고 즐거워야 할 학교 생활이 모든 문제의 온상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학교의 목표가 학생들에게 한 인간이자 사회 수성원으로서 필요한 최대한의 인격 형성과 최소한의 지식 습득을 하게 하는 것이거나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일정한 수준에 올려 놓은 것이라면, 낙제제도는 필요할지언정 석차를 매길 이유는 없다. 교사나 보호자가 성적과 순위에 집착하는 까닭은 모든 교육기관의 최종 목표가 대학 입시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를 감옥이나 감옥과 유사한 억압의 공간으로 여긴다면 그 이유는 학생을 교육이라는 수단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교사와 보호자 때문이다(380).

 

교사에 의해 학생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과정은 대략 이렇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다. 공부 잘하는 것과 말 잘 듣는 것.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곧 말을 잘 안 듣는 것으로 간주한다. 공부도 못하면서 말도 안듣는 아이는 문제아로 교사에게 낙인찍힌다. 거기서 교사의 차별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차별은 점점 눈에 보이는 체벌이나 인격적 모욕으로 나타난다. 학교에서의 체벌만 폭행이 아니다. 인격 모독적인 폭언, 멸시, 차별, 무시, 명예훼손, 모욕, 강요, 사생활 침해 등도 항상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381).

 

어른이 할 일

 

공부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아이들이 어른과 똑같은 감정의 질곡에 갇힐 필요는 없다. 가만히 앉아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뛰어다는 것이 더 좋은 아이도 있다. 책을 많이 보고 성실히 공부한다고 반드시 좋은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으면 마음의 상처를 입기 쉬운 안타까운 감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아이들부터 배려해야 한다. 그것을 지켜주는 일이 어른의 의무이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이들의 특권이다(387).

 

<참고문헌>

김진규 외(2020). 학교폭력 및 학생의 이해. 파주: 정민사.

차병직(2020). 존엄성 수업. 서울: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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