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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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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정학] 한국 고대사회의 교육에 답하다
작성자 : Edu연구소1   조회수 : 472

한국 고대사회의 교육에 답하다

     

혼자 철학하는 시간

 

<철학적 물음 만들기>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원시신앙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동물, 식물, 숫자 등이 상징하는 의미를 공부해 보자.

단군신화에 내포된 사상 중 교육과 관련된 이념은 무엇인가.

삼국시대 학교에서 가르친 공통 내용은 무엇인가.

백제의 오경박사에 대해 공부하고 난 후 백제의 교육수준을 토론해 봅시다.

화랑도와 관련된 지식을 모아 정리한 후 그들이 통일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토론해 봅시다.

원효의 철학을 유아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거북이의 첫 번째 물음>

단군신화의 내용을 근거로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분석해 보자.

그들의 생각

나의 생각

 

 

 

<꼬꼬무-거북이 밑에 거북이의 물음>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애니미즘(animism), 샤머니즘(shamanism), 토테미즘(totemism,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범은 토템의 일종이다.)의 흔적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의 생각

나의 생각

 

 

원효의 철학을 유아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생각

나의 생각

 

 

 

<철학적 물음에 해답 찾기>

 

1. 원시 고대사회와 교육

 

1) 시대적 배경

 

삼국유사(일연스님, 1206~1289)에 의하면 기원전 2333년 한반도에 고대국가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고조선은 씨족공동체가 여러 부족국가로 자리 잡게 되고 그 중 고조선이 다양한 부족국가를 아우르고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 되었다. 이미 50만 년 전 한반도에는 구석기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구석기인들의 유물과 유적은 지금의 평양 근교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이후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원시 고대문화가 정착되었다.

원시 고대인들은 모계중심의 씨족공동체 사회였다. 그런 생활을 정신적으로 지배한 것은 원시종교로 알려져 있는 애니미즘(animism), 샤머니즘(shamanism), 토테미즘(totemism,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범은 토템의 일종이다.) 등이었다. 그들은 자연만물과의 일체감을 가지고, 그것들을 숭배하며 자연만물의 신성함을 믿었다. 우리는 그들의 원시종교를 통해 당시 그들의 가치관, 자연관 및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2)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문자 이전의 원시 고대사회 교육의 흔적은 그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의 교육은 씨족 공동체 생활 그 자체였을 것이다. , 생활이 곧 교육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생활은 크게 의식주를 구하고 생존을 위해 외부 침입자를 방어하는 활동, 즉 생존을 위한 차원의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집단의 영속적인 생존을 위해 성인들의 수렵과 채집 활동을 모방하고 관찰함으로써 자연스럽고 비의도적이며 비형식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2. 단군신화와 홍익인간

 

1) 시대적 배경

 

단군신화는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서 실제 존재했던 고조선의 건국신화이다. 단군신화는 당시 고조선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신화는 신비로운 사건으로 다분히 비과학적이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인간의 갈망을 담은 인간의 이야기이다. 인간이 그럴 수만 있다면 굳이 신을 동원해서 인간존재를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신이라는 인간의 존재이유를 내세우면 인간이 한 일에 정당화를 부여하게 되므로 누구의 의심을 받을 이유가 없어진다. 이유야 어쨌든 신화는 우리의 존재이유,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의식, 즉 선민의식(選民意識: 신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민족우월의식)을 고취시키기에 가장 좋은 신의 이야기,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2)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단군신화 역시 당시 부족연맹국가를 통 폐합하여 최초의 국가를 건국한 고조선에게는 그들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단군신화를 통해 그들은 신의 아들들이며 신의 보호를 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창조해낸 단군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교육적 이념과 가치가 담겨져 있다. 첫째, 환인 천제(환웅의 아버지)가 환웅에게 부여한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인 홍익인간의 이념, 둘째, 곰과 범이 사람이 되는 힘든 과정은 곧 인간을 교육하는 과정이라는 사실 등이다. 그리고 단군신화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평등(곰과 인간의 소통), 즉 천지의 조화(지상의 웅녀와 천상의 환웅의 결혼), 생명(인간)존중, 현세 지향적 세계관(웅녀가 감히 환웅과의 결혼을 꿈꾼다.), 이타주의(환웅은 인간을 사랑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 등 한국인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교육이란 인간형성의 활동이다. 단군신화는 어떤 인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명확한 방향을 설정해 주고 있다. 해방 직  형성된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의 탄생을 단군신화를 통해 알 수 있다. 21세기를 관통하는 교육이념과 가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인간의 이야기, 단군신화는 외국인 친구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한국의 집단무의식이다.

 

3. 삼국시대의 교육

 

1) 시대적 배경

 

고조선을 비롯한 원시 부족국가 수준의 국가형태에서 벗어나 고대 민족국가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불교의 유입과 국가 공인이었다. 불교는 국가의 정신적 통합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삼국의 불교 공인의 시기는 국가의 체제(중앙집권화)를 갖추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삼국이 불교를 공인한 순서(고구려: 소수림왕 372, 백제: 침류왕 384, 신라: 법흥왕 527)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는 시기와 엇비슷하다. 유교의 전래 시기는 명확한 기록이 없지만 불교의 수입보다 훨씬 그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2) 고구려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1) 태학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한 해인 372년에 국립학교 태학(太學)을 설립하였다. 태학에서의 교육내용, 교육대상 등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건국한 이래 400여 년 동안 한나라(기원전 206~220, 중국의 두 번째 통일국가로 유학을 중심으로 나라를 경영함)의 지배를 받아 문화적으로 한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태학제도 역시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므로 태학에서의 교육내용도 유학 경전(四書五經, 즉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4서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5)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삼국에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이미 유교는 정치와 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것이다. 태학의 교육 대상은 상류계층의 자제였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태학의 설립 목적도 고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여 관리로 등용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경당

 

상류계층의 자제를 대상으로 고등교육기관이 태학이라면 경당(扃堂)은 지방 마을마다 설립된 일반대중을 위한 초중등교육기관이었다. 태학과는 달리 교육대상을 한정하지 않았으나 서민자제와 지방귀족의 미혼 자제들이 주로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내용도 태학과 유사하였다.

교육목적은 활쏘기와 독서를 강조하여 유사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육성이었다.

 

3) 백제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1) 오경박사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하였다. 백제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는 고이왕(234~286년 재위) 때부터였다. 그 이후 근초고왕(346~375 재위)을 거쳐 침류왕(384~385 재위)에 와서 중앙집권적 통치이념을 굳건히 하였다.

백제의 교육기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위에 든 세 왕을 거치면서 교육제도가 성립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285년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논어,천자문을 전해 주었고, 375년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에게서기를 만들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박사라는 직제를 둔 것으로 보아 교육기관의 존재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에는 오경박사라는 직제가 있었다. 오경박사는 교육관련 관직(예를 들면 교수)임과 동시에 유학경전에 능통한 학자를 말한다. 이들은 중앙에 머물면서 관학에 나아가 오경을 강의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경박사뿐만 아니라 의학, 천문, 지리 등의 다양한 영역에 정통한 전업박사(專業博士)들도 활발하게 활동 하였다.

 

(2) 학교제도

 

백제의 교육제도나 교육기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관제(官制)를 통해 학교 성립의 가능성을 엿 볼 수 있다(신차균 외. 2014). 그 근거로는 백제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여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그것을 일본에 전수해 줄 만큼 수준 높은 문화와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학교교육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의 예를 들면, 사도부(司徒部: 학문과 교육담당기관), 내법좌평(內法佐平: 예의범절을 총괄하던 직책) 등이다.

그러므로 백제는 학교교육과 관련된 책임자(내법좌평), 책임부서(사도부), 교육자(오경박사)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백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학교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4) 신라 및 통일신라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1) 화랑도의 교육철학

 

신라는 별도의 학교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랑도(花郞徒)라는 청소년 심신수련 단체를 통해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랑도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지 체를 겸비한 사회지도자급의 인재양성제도로써 6세기 진흥왕(眞興王 540~576년 재위) 때 중앙정부에 흡수되면서 체계적 조직(원화 또는 국선-화랑-낭도)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전국의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을 돌아다니며 시작(詩作)과 음악, 유희(덕성을 위한 예술활동)를 즐기고, 무예를 닦고(), 공자, 석가모니, 노장(노자와 장자), 즉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花郞: 세속오계)을 화랑과 낭도(郎徒: 화랑을 따르면서 화랑과 서로의 인격도야를 돕는 사제관계에 있었던 수백 명의 무리)들이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며 익혔다().

 

(2) 국학

 

신라는 통일(문무왕, 676, 재위: 661~681) 후 김춘추(604~661,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태종무열왕의 이름)648년 당나라에 가서 국학을 참관하고 돌아와 국학(국가가 인정한 현재의 대학에 해당됨) 설치를 위한 준비를 하고 신문왕 2(682)에 더 많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당의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국학제도를 완성하고 본격적인 유교교육을 실시하였다.

국학은 6두품 출신 귀족 자제(15~30)를 대상으로 9년 동안 수학(修學: 학문을 닦음)하게 하고(미숙자는 퇴학시킴) 졸업과 동시에 대내마(大奈麻, 벼슬이름) 17관등 중 10등위 등의 관직을 얻었다. 국학의 운영은 박사, 조교를 두고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특히 논어와 효경(孝敬)을 중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통일 후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신라는 잡학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의학, 법률, 천문학, 건축, 공예, 산학 등의 잡학과목을 두어 국가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해 나갔다. 신라의 건축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런 데서 교육받은 탁월한 공예가와 건축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통일 후 신라 중기 이후에는 귀족인구의 증가로 관직 부족현상이 빈번하였다. 국학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을 모두 관리로 등용할 수가 없어 더욱 양질의 관리채용과 유교사상의 연구 및 보급을 목적으로 과거제도의 성격을 지닌 국가시험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국학의 학생들을 독서능력에 따라 상··하로 구분하여 관리를 선발제도)를 설치하였다. 이 과거제도는 우리나라 과거제의 효시로 원성왕 4(788)에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독서삼품과 통해 최치원(崔致遠, 857~미상) 등과 같이 유학 경전에 탁월한 실력을 가진 우수한 인재가 선발되기도 하였다.

 

(3) 원효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설총(654~660년에 태어남~미상, 유학자, 외교문서작성에 유능했던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신문왕에게화왕계지어 받침)의 아버지이며,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의 딸)의 남편이기도 한 원효(617~686)의 철학은 부처의 세계와 인간세계의 묘합의 원리에 접근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상대사와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사건을 통해 한 순간에(한꺼번에) 어떤 진리(一體唯心造, 일체유심조: 모든 현상과 사실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를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경주로 돌아와 대승불교의 핵심적 이론서인대승기신론을 번역하는 등 저술과 불교의 대중화에 매진하였다.

원효는 당시 교(교종과 선종)의 대립과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융합의 진리, 즉 일심화쟁(一心和諍: 조화의 불교사상)의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화쟁(和諍)은 원효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 핵심은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 교종과 선종의 진리를 서로 인정하여 그 둘을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려는 사상)이다.

이런 원효의 철학에서 그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그는 교육의 대중화를 위해 애썼다. 그는 무애호(無碍瓠: 괴이한 모양의 표주박으로 만든 도구)를 만들어 각처로 돌아다니며 무애호를 두드리며 춤을 추거나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면서 서민들의 무지를 교화하려고 애썼다. 둘째,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교육방법을 동원했다.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경전의 진리를 깨닫거나 오랜 기간의 참선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원효는 의미는 잘 모르지만 누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쉬운 말만 반복해 하면 쉽게 열반의 경지(인생의 목표와 지금의 소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셋째, 그의 화쟁사상은 조화와 통일을 지향한다. 화쟁은 오늘날 학교의 교사와 학습자 간 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치유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서로의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높은 차원에서 서로의 의견이 통합된다면 평화롭고 정의로운 학교와 가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원효의 일심사상, 화쟁사상, 원융회통사상, 무애사상 등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것들도 모두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하나에 해당되는 사상이다. 그는 일심사상에서 진여(眞如: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와 생멸(生滅: 생겨나고 소멸함)의 화쟁을 말했으며, 일심사상은 화쟁의 귀결이다. 그리고 무애사상은 화쟁사상의 결과로 도출되는 것으로 보다 큰 자유의 실천을 말한다(신차균 외. 2014).

 

<철학적 물음에 함께 해답 찾기> 

 

<거북이의 첫 번째 물음의 답>

단군신화의 내용을 근거로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분석해 보자.

다른 사람들의 생각 종합

나의 생각을 더해 내린 결론

 

 

 

<꼬꼬무-거북이 밑에 거북이의 물음의 답>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애니미즘(animism), 샤머니즘(shamanism), 토테미즘(totemism,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범은 토템의 일종이다.)의 흔적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 종합

나의 생각을 더해 내린 결론

 

 

원효의 철학을 유아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 종합

나의 생각을 더해 내린 결론

 

 

 

  

다시 혼자 철학하는 시간

 

<요약 정리한 내용과 토론의 결론을 토대로 창의적 글쓰기>

 

 - 화랑도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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