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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교양과정부 학생, 교양과목, 교양강좌, 교양인 등등 교양이란 말을 항상 듣는다. 그런데 교양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정의를 내리고쓰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면 우선 교양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01
교양의 유래
교양의 유래

교양이란 말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빛은 동방에서, 법은 서쪽에서"(ex oriente lux, ex occidente lex)란 로마의 격언부터 이해해야 한다. “빛은 동방에서”란 우리도 가끔 쓰는 소위 동양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나, 사실은 로마인들이 헬레니즘 Hellenism 을 찬미해서 하는 말로, 자기네들은 정치나 알았지, 진짜 문화는 헬레네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문화적 굴복의 뜻이었다. 그러한 굴복을 웅변적으로 대변한 최초의 로마인은 키케로 Cicero (106B.C~43B.C)였다. 그는 귀족 자제들이 상원의원이 되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법률 · 문학 · 논리 · 역사 · 철학 등을 헬레네 작품을 통하여 배울 것을 주장했고, 교육을 통하여 소년들을 문명 개화한 웅변가로 만들 것을 역설했다. 로마인들은 그렇게 훈련된 사람을 그냥 무식한 사람 호모 homo 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마누스 humanus 라고 불렀고, 그런 형태의 문화를 후마니타스 humanitas 라고 불렀다. 이 말에서 인문계 과목 혹은 교양과목을 뜻하는 humanities 도, 인문주의를 뜻하는 humanism 도 나왔고, 르네쌍스 시대의 인문주의란 바로 이 “키케로 주의” Ciceronianism의 부활을 뜻했다. 키케로 주의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헬레네 도시국가 Polis 생활에서 필요했던 소피스트 Sophist 교육, 말을 바꾸면 장돌뱅이 같은 말 재주만 배우는 웅변주의를 뜻했다. 그러나 건전한 가족제도를 가지고 세계국가를 창설한 로마 제국도 결국은 이 “동방의 빛” 때문에 망하고, 게르만족 이동이 서양을 중세의 암흑으로 몰아 넣을 때에, 6세기부터 크리스트교 수도원에서는 학자들이 7 자유과 seven liberal arts 란 것을 만들어 무식한 야만인들을 새로운 교양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liberal arts 란 오늘날 문리과대학이란 말의 어원도 된 것이며, 그 내용은 문법 · 수사학 · 논리학의 초급 3과 trivium와, 기하 · 산수 · 천문 · 음악의 고급 4과 quadrivium로 되어 있었다.

명실상부하게 문과 이과를 망라한 기초 과목으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교양이란 개념보다는 훨씬 넓은 것이었다. 다만 기하학과 천문학 사이에 산수가 고급과목으로 끼어 있는 것은 Arabia 숫자 탄생 이전의 셈이 얼마나 힘들었던가를 표시하는 좋은 표본이다. 그리고 서양 중세의 이러한 자유과 교육이 Arabia 과학의 흡수와 더불어 근세 서양 과학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가 지나 르네상스 시대가 되자, humanism 운동이 일어나 전체적 교양이란 문제가 잠시 후퇴를 시작했다. 그것은 소위 “문예부흥”이란 말이 그 내용을 잘 표현하듯이, 키케로주의로 되돌아가는 그레코・로만 고전 작품의 중시만이 인간 교양의 전부인 것 같은 일종의 상고주의적 후퇴였다. 말하자면 우리 조선왕조시대까지도 고등고시가 소위 백일장 식의 글짓기 대회였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르네상스 시대의 humanism 개념은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는 인문주의 평중의 교양 개념 확립의 뿌리가 되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잠시 동안 밖에 맥을 못쓰던 이 인문주의자들의 덕택으로, 어려운 키케로 시대의 고전 Latin 어를 배우는 것이 교양의 기초로 여겨져, 라틴 문법을 배우는 문법학교 Grammar School이란 말이 오늘날까지도 초등학교의 뜻으로 일부에서 남게 된 것은, 마치 우리나라에서 20세기 초까지 어린이들이 「소학 小學」, 「십팔사략 十八史略」, 「논어 論語」, 「맹자 孟子」를 뜻도 모르고 글방에서 외던 것과 꼭 같은 현상이었고, 훈민정음 訓民正音 이 나와도 한문 漢文 으로 글을 안 쓰면 학자 노릇을 못했던 것 같이, 서양 사람들도 18세기까지는 라틴어로 저서를 내지 않으면 학자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화운동으로는 “문예부흥”이니 humanism이니 하는 것은 아무런 체계도 설 겨를도 없이 금시 사라지고, 수학・물리학・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만이 유일한 철학자이며 최고의 문화인이라고 하던 시대가 서양 근세에서 벌어졌다. 프랜시스 베이콘 Francis Bacon(1561~1626, 대표작 Novum Organum)을 필두로, “Cogito ergo sum”의 철학으로 유명한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1596~1650, 대표작 Discourse on Method), 스피노자 Spinoza(1632~1677, Pantheism의 주창자), 라이프닛쯔 Leibnitz(1646~1716, Monadology의 주창자)를 거쳐, 아이작 뉴우톤 Isaac Newton(1642~1727, 대표작 Principia)의 “인력의 법칙” law of gravity에 의한 새 인생관・세계관의 형성은, 18세기를 개명과 진보의 우상 속으로 몰아넣는 사상의 천지개벽을 가져오게 했다.

02
인문과 과학의 투쟁
인문과 과학의 투쟁

인간으로서 필수 교양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결국은 인간이란 무엇이냐? 인생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이냐?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이냐? 하는 등등의 물음에 대한 해답과 맞먹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진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그가 주장하는 교육의 역점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Francis Bacon은 묵은 사고방식에 대해서 유명한 “4 우상론”을 폈고, René Descartes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존재만을 역설하면서, 경험과학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풍조를 일으켰다. 그러다 보니, 결국 교양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인문과 과학의 투쟁으로 전환되고 말았고, 인문이란 humanist의 것이건, 종교개혁자 reformist의 것이건, 다 종교에 관계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종교와 과학의 투쟁인 성격을 안 띨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이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차차 전 세계에 파급되자, 공업기술의 발전 여부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하는 표적이 되고, 도덕과 종교와 착함의 힘이 아니라, 대포와 군함과 악독함의 힘이 열강 Great Powers이란 힘을 만들게 하여, 권력은 정의이고, 외교관이란 정직하게 거짓말 잘하는 사람인 제국주의 시대를 예비하게 되었다. 동시에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의 발달을 가져와, 대중은 생산의 기계를 돌리면 돌릴수록 한없는 가난이 뒤쫓아 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고, 마치 Benz 차와 지게꾼이 같은 길 위를 걸어 다니듯, 초현대화와 최낙후가 공존하는 호화와 비참의 병행에 아무런 느낌도 없는 비양심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학 sociology이란 새 학문을 창설한 오규스트 콩트 Auguste Comte(1798~1857)는 그 자신의 역사철학을 내세워, 인류 문화는 “신학적 단계”, “철학적 단계”를 거쳐, 그가 말하는 소위 “실증적 단계” positivistic stage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과학적 자연주의에 해당하는 실증주의 positivism의 사회학을 만들어 냈다.

Comte의 주장은, 인간이 종교란 미신을 갖는 것은 원시적인 신령숭배, 신령지배 시대의 일이고, 그 다음에 추상적 이론과 관념이 지배하던 형이상적 시대 metaphysical age가 뒤따랐고, 이제 자연과학의 도움을 받아 과학적으로 사회를 고찰할 줄 아는 사회과학이 성립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과학만능의 예언자인 그는 “주권재민”의 democaracy를 바보들의 정치라고 욕하고, “양심의 자유”란 미개인에 의한 천재의 억압이라고 비방하고, 물리・화학・생리학에 무슨 양심의 자유가 필요하냐고 그는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교양의 문제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다. 또 그러기 때문에 교양이란 캐려면 양면전투가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그 전선의 우익은 케케묵은 인문주의 전통에 의한 것이고, 그 전선의 좌익은 무식한 과학기술 만능사상가에 대한 것이다. 과학교육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우익 인사들은 인류 문화의 거대한 진보를 무시하고, 과학기술의 업적이 오늘의 사회복지의 근원인 줄을 모르는 무식장이들이다. 또 양심이 문제가 안 되는 과학 광신도 좌익들은, 인간을 주먹힘 센 놈이 제일인 원시상태로 몰고 갈 위험 인물들이다. Apollo 11호가 달에 착륙했어도 천지창조의 신비는 그대로 남았고, 우주인들은 우주의 건너편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바쳤고, 그들의 대통령도 그들의 가족들도 다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미사를 바쳤다. 양심과 도덕 없이, 산 종교 없이, 역사와 철학과 예술과 문학 없이, 인류는 달 나라에 가 보아도 먼지 밖에 발견할 것이 없다. 또 과학과 기술 없이, 산업혁명과 공업 없이는 인류는 오늘도 Papua 섬의 식인종들처럼 구석기 시대의 원시상태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문과 자연도, 과학과 종교도, 서로 싸워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부축해야 하며, 서로 모자라는 것을 메워감으로써 인류의 건전한 진보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교양교육 문제는 전에 없이 중요한 관심을 모으게 하고 있다. 결국 교양교육이 잘못되면 교육은 받은 인간이로되, 절름발이 인간이 되기가 쉽고, 한 쪽만 보고 한 쪽은 못 보는 애꾸눈이 되기 쉽다.

03
동양과 서양의 갈등
동양과 서양의 갈등

교양의 문제는 인문과 과학의 투쟁에서만 말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갈등 속에서도 큰 문제가 있다. 근세 이래 소위 근대화 과정의 앞장을 선 것은 Western Europe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과학기술의 묘안을 구사하여 전 세계를 서양화해 버린 것도 그들이었기 때문에, 서양의 것은 무조건 존경을 받고, 동양의 것은 무조건 천대를 받게 된 현실에서, 사실상 우리는 동양도 아니요 서양도 아닌 국적 없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집에서는 된장 찌게를 먹고, 다방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가끔 목에 기타를 걸고 사이카델릭 psychadelic의 가락에 흥겨워 하고, go-go의 원숭이 체조로 신나게 놀 줄은 알아도, 판소리나 육자박이에는 먼나라 것과 같은 혐오를 느끼는 것이 우리 대학생들의 흥취이다. 그런데 동양에 대한 재인식은 먼저 서양 사람들에서부터 나왔다. 18세기 서양 개명 enlightenment 운동의 선구자요 총사령관이었던 볼테르 Voltaire(1694~1778)는 자기집 기도소에 공자 孔子 의 화상을 모셔 놓고 조석 예배를 드리면서, 유교 사상을 18세기 계몽사상과 자연신 숭배 Deism의 원천으로 삼았고, 중농주의 경제학을 창설한 프랑솨 케네 Franҫois Quesnay(1694~1778)는, 자연법에 기초를 둔 중국 사상에 도취하여 자기 주장을 합리화시켰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하려고 강희 康熙・건륭 乾隆 황제에게 온갖 문화적 착취를 다 당하던 예수회원 Jesuit 들의 조직적인 동양학 연구의 성과에서 온 결과였다. 그리고 “태양왕”으로 자처하던 루이 Louis ⅩⅣ(1638~1715) 시대의 서양 지성인들의 눈에는 중국이 지상 천국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동경은 13세기의 Marco Polo 이래 변함이 없었고, 1492년 ColumbusAmerica에 도달한 것도 사실은 거대한 보물 나라 중국을 향해서 가던 도중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양 숭배열은 영국이 아편 밀수를 위한 아편전쟁(1839~1842)을 청국에 강요하여, 군함과 대포의 힘으로 이 “잠든 사자”를 잠든 돼지”로 만들어 버릴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전까지도 영국이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아니꼬와도 “영국조공사”의 깃발을 들고 북경(北京)에 들어가, 황제의 무릎 아래 허리를 굽히지 않고서는 안되었었다. 그리고 힌두 Hindu 사상의 영향은 쇼펜하워 Schopen-hauer(1788~1860), 니이체 Nietzsche(1844~1900)의 세기말적 염세주의에 까지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전진은, 쳐부수고 무찌르는 군비확장・병기공업의 발전 이외에,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다 가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승자에 영광이 있고, 패자에 멸시가 따른 동양의 위축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애국 시인 키플링 Kipling(1865~1936)은 오만불손하게도 이 동양 야만인들을 다스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백인의 부담” White man’s burden 이라고까지 까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모두 군국주의자만 사는 것이 아니다. 니이체와 같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양의 과학만능이 자신의 반성을 시작하게도 했고, 양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치르고난 쓰디쓴 뒷맛은 “과학은 권력의 이용”밖에 더 되느냐는 회의를 느끼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한편, 서울에서 울릉도로 가기보다는, 서울에서 시애틀 Seatle을 가기가 더 빠른 시대가 되어, 30시간 이내에 세계 어느 구석 사람들도 한 곳에 모일 수 있게 된 이 객관적 조건의 변화는, 세계 가족과 타인에 대한 관심 속으로 우리를 안 몰아넣을 수 없게 되니, 새삼스레 서양의 대학에서는 동양학에 대한 연구열이 높아지고, 동양 문화에 대한 서적과 참고품이 수없이 수집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양에 대한 관심은 다시 서양의 유행으로 우리에게 재발견 되게 되는 역수입이 나타났다. 그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기는 A-A(Asia-Africa) nationalism 시대가 되어, 날마다 지도상에 신생국가가 불어나는 형편이고, 우리도 8・15 이후 이 신생국가의 진통을 겪고 있는 국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신생국가가 가진 밑천이란 어디서나 그리 넉넉한 것이 못되며, 그 중에서 아마 제일 첫째가는 것이 nationalism 이란 주체 의식일 것이다. 사실 민족의 주체성 의식이 없이는 독립국은 유지될 길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문화를 형성해 온 동양학의 테두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인 한국학의 테두리 안에서도 커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양이란,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 자신을 길러낸 동양의 문화유산을 아는 일이 다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켜 주고, 우리의 의지를 단련시켜 주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04
거인의 어깨 위의 난쟁이
거인의 어깨 위의 난쟁이

11세기부터 벌써 프랑스에 인문주의의 꽃을 피우던 샤르트르 Chartre 수도원 학원장 베르나르 Bernard(d.1120)는 중세기 최선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앉은 난쟁이와 같다. 우리는 옛사람보다도 많은 사물이 보이고 멀리도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시력과 신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그 거인과 같은 크기로 우리를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라고. 이 말은 틀림없이 최고의 명언이다. 우리는 다만 거인의 어깨 위에 무둥 선 난쟁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일평생 난쟁이로 남아 있으면 우리 후손도 우리만큼밖에 보이지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빨리 성장해야겠다. 그리고 그 성장은 거인들의 문화유산을 빨리 흡수하고 소화하는 일로밖에 이루어질 수가 없다. 아니 그 유산상속마저도 겨우 우리를 거인의 어깨 위로 올려놓는 일밖에 안 된다. 성장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것을 그 위에다 더 보탬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기에 우리의 교양 문제가 중요한 뜻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여기서 우리가 다루어 오던 교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미해결로 남아 있다. 우리는 평생 걸려도 선인들의 업적을 다 독파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어도 일 년이면 겨우 12권, 대학 4년간에 겨우 48권밖에 못 읽는다. 우리는 우량도서 100권을 독파하려면 한 달에 두 권 이상은 읽어야 4년간에 마칠 수 있고, 교양과정부 2년 동안에 그것을 다 하려면 한 달에 4권 이상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전공과정에 대한 책도 읽으면서, 교양서적 4권을 한 달에 떼기란 이만저만한 설계와 의지와 노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교양을 쌓기에는 길잡이가 필요하고, 양서를 고르기에도 역시 최상의 안내가 필요하다. 먼저 알아 둘 일은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류의 업적을 망각의 세계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역사를 써 두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역사는 언제나 인류의 거울이고, 인생의 인내서이고, 모든 인간 행위에 대한 산교과서가 된다. 송(宋)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은 그런 뜻에서 역사를 “정치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고금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거울”이란 말로 「자치통감 資治通鑑」 (1084)이라 불렀고, 여기서 통감(洞鑑)이란 말이 history를 뜻하게 되었고, 「동국통감 東國洞鑑」이 바로 Korean History의 뜻이 되었던 것이다. 또 공자 孔子는 「논어 論語」에서 “온고지신 溫故知新”이란 말을 썼다.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는 우리 교양의 길잡이로 세계문화사를 맨 먼저 들어야 한다. 그것을 보면 우리는 이때까지의 인류가 남겨 놓은 업적들 중에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체로 걸러져서 빠질 것은 다 빠지고 남은 알짜만을 알 수가 있고,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들의 반응이 어떻게 했을 때에 성공했고, 어떻게 했을 때에 실패했는지를 잘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역사의 길잡이를 통하지 않는 교양의 안내란 있을 수 없고, 또 역사의 지식 없이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의 난쟁이도 될 수가 없다. 교양인으로서 세계사를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누구보다도 먼저 아름다운 문장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식시킨 것은 먼저도 말했던 Voltaire였고, 그는 처음으로 동양까지를 포함한 「세계사」(1756)을 썼다. 그리고 그러한 교양이 인류의 개명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했는가는 바로크 Baroque시대의 세계사적 의의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면 알고도 남을 일이다. 그것은 실로 인류의 종교・도덕・철학・예술・문학・정치・법률・경제・사회생활 전체를 뒤엎어 놓은 결과를 가져왔고, 인류의 새 역사가 출발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동시에 Voltaire식 교양은 베르사이유 Versailles 궁전의 모방이 유럽 전체의 궁전에 번짐과 더불어 번졌고, 귀족화된 프랑스 문화의 잔재가 아직도 레스토랑 restaurant에서 메뉴 menu란 말과 그 내용에까지 남을 정도로 넓고도 긴 영향을 끼쳤다.

아무튼 세계문화사가 중요한 것은 인간 idea의 상속이 가능한 데 있다. Idea란 불멸의 것이다. 항상 새 것이 나오는 것 같아도 기본적인 것은 몇 개에 불과하다. 그 몇 개 안되는 것이 늘 새 옷을 입고 나오기 때문에 새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도덕・종교・철학・문학・예술 등에 항상 어떠한 사상이 붙어 다니며, 그것이 정치・법률・경제 등 사회생활에 반영되며, 그것들의 발전과 전승을 모조리 엮어 놓은 것이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사상의 역사를 아는 것은 교양 중의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나는 생각하는 고로 존재한다. 나의 사회적 존재가 나의 ideology를 결정한다는 Marx의 말은 아마 미스프린트일 것이라고 임어당(林語堂)은 말했다. 그 말은 맞다. 그 사회적 존재가 결정해 준 그 ideology란 공산체제에 대한 찬송가를 부르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다. 마음 속의 감옥은 탈출도 할 수 없는 답답한 것이며, 멍텅구리와 거짓말장이 밖에 발언권이 없는 사회를 안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는 생각해야 된다.

05
자기를 꾸미는 동물
자기를 꾸미는 동물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연모를 만드는 동물 tool making animal 이며, 또한 자기를 꾸미는 동물 self-decorating animal 이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수단이 되고 어떤 것이 목적이 되는가에 따라, 기본 교양의 역점은 사뭇 달라진다. 그러나 연모를 쓰면서 사회생활을 통하여 자기를 꾸미고 사는 인간이고 보면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것에 대한 교양도 빠질 수가 없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다만 그 어느 것이 수단적인 것이고 그 어느 것이 목적적인 것이냐는 문제는 각자의 철학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인간의 교양은 그 길잡이가 찾는 출발점부터 또한 철학의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언제나 인생 각자가 다 철학을 갖지 못하면, 무엇 하나 골라잡을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게 되며, 그러기에 사상의 역사를 읽는 것이 바로 교양의 출발이라고도 말했다. 사실 무엇이 수단이고 무엇이 목적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모를 만든다는 것이, 다시 말해서 생산과 기술과 과학이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닐 것이다. 또 정치제도와 조직 속에서 사회생활을 해야 살 수 있다는 것도 불가피한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인생의 목적은 self-decoration animal 이란 면에서 밖에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것은 중요한 철학인 동시에 중대한 역사인식이다. Karl Marx(1818~1883)는 “생산양식을 개인 생존을 위한 방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그 생명의 표현 형태이다. 인식이 생활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인식을 결정하는 것이다”라 했고, Engels(1820~1895)는 “유물사관의 참됨은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입어야 산다는 그 평범한 진리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를 색안경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 인류는 그 어려운 살림의 첫고비부터, 먹고 마시고 입는 일과는 전연 관련이 없는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해 왔다. 이때까지 알려진 인류의 최초의 유적은 우리가 네안데르탈(Neanderthal)인이라고 부르는 독일의 Neander 계곡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어머니와 아들의 무덤에서였다. 이승에서의 가족이 저승에 가서도 한 가족으로 살라는 내세의 생명 life after death에 대한 종교관이 없었으면 시체를 그냥 들에 던지고 말았을 것이지, 먹을 것까지 담아서 묻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최초의 homo sapiens였던 Cromagnon인들은 남쪽 프랑스 크로마뇽 지방 동굴에 무수한 벽화를 남겼다. 오늘날 Papua 섬에서 아직도 원시생활을 계속하는 그 인종들도, 이마에 뿔을 달고, 콧구멍에 큰 조개껍질을 달고, 얼굴에 흰 금을 그어, 먹고 마시는 데는 전연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 또 오늘날 문명한 도시의 남녀들도 먹고 마시는 것을 잊고 줄여 가면서라도 self-decorating에 여념이 없다. 그러면 인류는 자기를 꾸미는 일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꾸민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자기를 잘 꾸미는 것일까? 이것도 또한 철학에 관한 문제이며 역사의 추경험 nachleben에서 결론지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자기를 꾸민다는 것은 결국은 자기 표현을 뜻하며 그 자기 표현을 통하여 ‘낙’을 찾는데 목적이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말을 바꾸면 “행복의 추구” pursuit of happiness란 자연권의 발로가 바로 그것이 인생에 살맛을 주는 “인생의 멋”을 찾는 일, 그것은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또 사람마다 같은 일도 아니다. 부다(budha)는 카필라 왕궁의 영화를 페리처럼 버리고 백팔(百八)번뇌의 해탈을 찾는 일에 자기 장엄의 길을 발견했고, 공자(孔子)는 “불의이 부차귀는 어아에 여부운(不義而 富且貴는 於我에 如浮雲)” 이라는 심경으로, “헌 옷 입고 맨 밥 먹고, 팔을 구부려 베개 삼고 누웠어도 락재기중(樂在其中)”이란 달관 속에 자신의 행복을 찾았고, 예수는 남을 제 몸같이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으로 제사 지내는 십자가로써 자신을 장식했다. 맹자(孟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을 만나, “나라를 이(利)롭게 해 줄 길”을 찾는 임금에게 “왕이 이(利)만 찾고, 장관이 이(利)만 찾을 때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이냐”고 되묻고 이웃 나라보다 자기가 더 잘했다는 혜왕(惠王)에게 “오십보 백보(五十步 百步)”란 욕을 퍼붓고, 의(義)를 찾는 일에 자기의 사명감을 발견했고, 사람들이 자기 집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가 내뺏을 때는 온 동네에 부산을 피우며 찾으러 다닐 줄은 알아도, 자기 양심이 달아났을 때는 그것을 찾을 줄을 모르니, 사람의 양심 값이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 값만도 못하냐고 꼬집고, 방심(放心)을 구하라고 외쳤다. A.D. 400년에 활약한 동보(東普)의 대화가 고개지(顧愷之)는 여사잠도(女史箴圖)를 그려 부인들은 거울을 들여다 보고 얼굴에 화장을 할 적마다 자기 마음의 화장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처럼 자기를 꾸미는 일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발소, 미장원, 양장점 일만이 아니라, 미술관, 도서관, 교양학부의 일을 거쳐 절간, 성당, 예배당, 수도원에까지 뻗치는 광범위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자기를 잘 꾸미고 못 꾸밈에 따라 인생은 아름다워 보이기도 추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가발을 쓰고 눈썹을 붙이고 귀걸이를 번쩍여도 꼴보기 싫은 여성이 얼마든지 있고, 저 혼자 아무리 으시대고 뻐기고 잘난 척해도 달라지는 것 없이 미워 보이는 남성도 부지기수다. 요는 바탕에 교양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06
미장원 문명
미장원 문명

오늘날 우리는 불행히도 미장원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하룻밤 자고 나서 세수만하면 다 벗겨지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미장원의 역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만큼 오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장원만으로 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빵만으로 살고 미장원만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미장원 문명의 세계적 전파의 시작은 아마 Voltaire까지 올라갈지도 모르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Americanism 에 더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1860년에서 1910년까지의 사이에 벌어진 미국의 “명백한 천운”manifest destiny 이 가져 온 번영과, 유물주의와, 부패와, 묵은 가치체계에 대한 무관심은, Mark Twain으로 하여금 “도금시대” Gilden Age라는 딱지를 붙여서 무자비하게 시대를 비꼬게 만들었고 또 어떤 사람(Godkin)으로 하여금 그것이 싸구려로 번쩍이는 채색 포스터와 같은 chromo 문명이라고 호된 비판을 가하게 한 바로 그것이 되었다. 민주국가에 광산왕, 석유왕, 철도왕, 방직왕, 강철왕, 화약왕, 사탕왕 등 무수한 벼락부자 왕공들이 각각 거대한 재벌왕국을 거느리고 군림하게 되니, 오색이 영롱한 대 저택에,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모르는 골동품을 응접실에 가득 진열해 놓고, 생전 읽지도 않는 금자박이 전집 서적들을 서가에 번쩍이게 꽂아놓고, 쇼팽인지 멘델스존인지도 모르는 음악을 감상한답시고 졸고 앉았는 고통을 참으면서 벼락 문화인이 되려 했으니, 그것이 크로모(chromo) 문명이 안될 도리가 없었다. 물질주의와 황금숭배가 유일한 철학이고 보면, 부정과 부패는 벌써 오장육부에 파고든 체질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어느 한 구석에서 숨쉬고 있는 양심의 가책에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는 술과 놀음과 호화와 부정축제가 바로 행복의 추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장원 문명은 더욱 기세를 올린다. 이 도금 문화, chromo 문명, 미장원 문명은 한마디로 부정 부패의 산물이다. 맹자(孟子)의 말대로 방심 放心(내뺀 양심)을 구하는 의를 찾으면 이런 상태는 안 벌어질 것이고, 양혜왕 梁惠王 철학대로 이利 만 찾으면, 백성은 길거리애 굶어죽어도 그의 왕궁만은 역시 고금 문화에 번쩍이듯이 별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를 잘 꾸미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우리는 어차피 자기를 안 꾸밀 수는 없다. 그러면 그것은 잘 생각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오늘 같은 인간 천대의 세상에서 잘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참 힘든 일이다. 경제개발이나 근대화가 결코 인간 개발이나 사회개발이 안 된다. 배기통과 굴뚝에서 나오는 공기 오염 air polution 을 비롯한 무수한 공해 公害 가 예고도 없이 우리 생명을 노리고 있는가 하면 날마다 벌어지는 교통전쟁, 주택전쟁, 생활전쟁 뿐만 아니라, 간첩작전, 경계선 분쟁, 월남전쟁, 기타 끊임없는 진짜 전쟁의 위협은 항상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번영하는 사회에서 물질문명만은 번성하고 있으나, 인간존중의 풍조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경향이다.

모든 생산은 인간을 위한다는 것보다도 이윤을 위한 생산이 되어 버리고, 그러기 때문에 인간도 또한 그 이윤을 위한 노동력이 아니면 구매력으로 밖에 안 보이는 색채가 농후해졌다. 사실 오늘날 버스 운전수나 차장이 사람을 버스값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적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또 정치라는 것도 인간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알 수도 없는 곳에서 꾸며진 정치에 인간이 이용당하는 것뿐, 매스컴(mass communication)도 오락도 다 그것에 이용당하는 것뿐, 정치참여라는 것도 수년에 한번 한 선거로써 그치고, 자신의 운명에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는 일이 전연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이 근본문제는 더욱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과의 대화는 끊기고, 자갈 한 개를 던지면 되 던져 오는 것 같은, 멋없고 무뚝뚝하게 뇌까리는 외마디 문답의 대화가 고작이고, 인간과 인간이 동거할 장소가 없어진 것 같은 새 유목민의 생활 같은 속에서 우리가 잘 생각한다는 것도 참 힘드는 일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대학에 들어온 새 유목민족의 모습은 더 처량하기만 하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 학교에 왔는지의 뚜렷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없고 4년 동안 무엇을 하며, 졸업 후엔 무엇이 되며 하는 데 대한 아무런 ‘비전’도 설계도 보장도 없는 그 애달픔이다.

입시지옥이란 그 지긋지긋한 시련, 몇 번 연거푸 마신 그 낙방의 고배, 그리고 제1지망도 제2지망도 다 버린 그저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다 아무데나 우선 들어가 놓고 보자는 종착역이 바로 여기, 그러면 거기에는 인생의 패배와 좌절감 밖에 있을 것이 없다. 정말 우리는 광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여유도 없다고 변명할 수 있고, 그래서 하룻밤 자고 나면 씻겨지고 말 미장원 문명 속에 우리를 내어 던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토인비(Toynbee)는 역사적 진리를 우리에게 일러 준다. “배움은 고난을 통하여 온다.” learning comes though pain 라고. 이 고난의 시대는 우리를 절망으로도 몰아 넣을 수 있고 분발심으로도 몰아 넣을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해서 마취제 마신 기분으로 살려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환경에 도전해서 “빠져 죽지 않으려거든 헤엄을 쳐라” sink or swim 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때에, 우리는 문명의 고난의 시대가 우리의 배움을 자극해 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잘 생각나는 문제는 자기 환경에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하며, 잘 꾸미는 문제는 자기 의지의 단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07
자신의 운전을 배우라
자신의 운전을 배우라

대학이란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그래서 대학교육은 절반이 교양교육으로 되는 것이 정상이다. 아니 그보다도 대학이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니는 곳이다. 그 이하의 정신적 미성년자는 와서는 안 될 곳이 대학이다. 대학이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인간상을 미국의 Fortune 지가 조사한 대로 소개하면, ①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적용할 줄 아는 사람 ② 넓은 취미와 관심을 가진 사람 ③ 자기 훈련이 잘된 사람 ④ 최소한도 만족할 만한 자기 철학의 뿌리를 가진 사람 ⑤ 순전히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면에서 많은 낙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대학은 학생들에게, ① 과학과 발명으로 열린 넓은 새 시야를 이해하도록, ② 동포에 대한 종교, 빈부, 귀천, 학식, 지방색을 초월한 민주적 이해와 존경심이 개발되도록, ③ 세계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④ 과학시대의 생활에 물질적인 면과 아울러 도덕적인 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도록, 교육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학 교육은 직업훈련(전공)과 아울러 인간도야(교양)가 반반으로 평행해 나가야 하며, 특히 ① 자신의 이해 ② 타인의 이해 ③ 그들이 사는 세계의 이해 ④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상호관계의 이해가 그 교양의 전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운전할 줄 알게 되며, 또 항상 자신의 의지에 채찍질을 가함으로써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이며, 패잔과 낙오를 면할 수 있는 길이다.

결국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운전한다는 것은 환경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인간은 출생에서 사망까지 환경 속에서 살며, 늘 환경은 전환되나 환경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대학이란 우리의 새 환경이고 새 살림의 보금자리인 새 가정과 같다. 환경이란 우리 주위의 일체의 사물, 제도, 인물, 사상, 유행,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있는 곳의 자연지리적 문화전통적 구체적 인간생활의 전부가 다 환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환경에 적응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학습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도 내 환경의 구성분자가 되는 것이다. 그 환경이 건전하고 뿌리 깊고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따라 갈 수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도 안심하고 그대로 그 환경 속에 파묻힐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불안의 시대, 동요의 시대, 혁명의 시대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환경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떤 환경이 자기를 마약굴 같은 데로, 사창굴 같은 데로 몰아넣고 말 수도 있다. 그래서 미장원 문명, chromo 문명이 우리 대학가로도 스며 들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신차려 자기의 운전을 배워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환경을 조성할 수도 있고, 나쁜 환경을 개조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인류문화는 계승전달만이 아니라 혁신첨가가 항상 앞장을 서 왔다. 그러자니 우리는 도피하지 말고, 내 자신을 알고, 합리적으로 자각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내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 능력을 안다는 것을 뜻하며, 내 능력을 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테스트 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길이 없으며 하고 난 다음에 후회를 해 보았자 이미 떨어진 꽃, 다시 가지에 붙일 수는 없는 일, 그러므로 자신을 알 수 있는 실마리는 오직 인간이 어떻게 해 왔는가를 아는 일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부터 역사에 기대는 이유이다. 또 우리가 합리적으로 될 수 있는 길도 과거의 경험에 의하여 어떤 모양으로 안내를 받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에 역사의 상실이란 개인에 대한 기억상실과 같은 것, 역사란 바로 인류사회의 기억인 것이다. 인류의 분별 있는 지각은 오직 역사에서만 나오는 것이며, 역사의 길잡이 없이는 우리는 먼저 말했던 나를 아는 일, 남을 아는 일, 세상을 아는 일 그리고 세상에서 그 3자의 관계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없이 우리는 이 변천하는 세계에서 이 chromo 문명 속에서, 새 유목민 같은 부평초인 나를 이끌고, 내 스스로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 그 방향감각을 잡을 수조차 없다.

08
정신사와 과학사
정신사와 과학사

우리는 어렴풋이 교양의 윤곽을 잡은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역사와 철학과 의지의 단련이란 면에서, 한 마디로 정신사적인 면에서 교양을 찾는 일의 주요성이 강조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진정한 교양의 내용을 찾으려면 양면 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했다. 그것은 케케묵은 인문주의 우익과, 몰상식한 과학 만능주의 좌익과의 싸움이다. 과학의 진보가 반드시 선(good)이 아니었고, “과학은 권력의 어용” 노릇을 한 과오도 범했지만, 우리의 교양이 “과학과 발명으로 열린 넓은 새 시야를 이해하도록”하는 일을 빼놓고 이루어질 수는 없다. 문교부가 낸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과학교육의 역할」(1966)에서 과학교육의 기본적인 목표의에, “과학은 한계가 있으며 우리에게 막대한 힘을 주는 동시에 그 힘이 인류의 이익을 위하거나 또는 파괴를 위하거나 간에 그 사용의 책임도 우리에게 있으며 또한 과학은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을 만한 가치체계를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음을 인식시킨다.”는 명확한 지적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과학을 사용하는 인간의 책임과 가치체계가 과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다. 그러나 인류문화사에서 과학사를 빼 버리고 역사를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과학 자체가 가치체계는 아닐지라도 인류 문명에서 과학을 빼 버리면 우리의 오늘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장군일지라도 군대 없이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장군이 군대를 만드는 것인가? 군대가 장군을 만드는 것인가?

이 문제는 플루타크(Plutarch) 에서 칼라일 (Carlye)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늘 되풀이되는 영웅숭배론의 주제가 되는 것이나, 인류와 동물의 구별이 문화창조에 있는 것만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고, 인류 가운데 언제나 진・선・미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류의 창조활동은 참으로 무한정한 것이나 그것을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성인(saint), 예술가, 과학자, 사회혁명가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들은 말하자면 천재적이고 영웅적인 활동으로 범인이 못하는 짓을 한 사람들이며 그들도 그들 이전의 문명의 축척 없이, 또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준 환경 없이 된 것은 아닐지로되, 역시 그들도 위대한 승리를 거둔 장군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중에서 인류의 진보에 누가 가장 공헌했는가? 그것도 장군이 군대를 만들었는가 군대가 장군을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와 꼭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성인의 진보란 것, 예술가의 진보라는 것이 생각될 수 있을까? 간디는 마호메트보다 공자(孔子)보다 성인으로서 진보했는가? 퇴보했는가? 그런 비교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헨델의 음악보다는 챠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진보한 것인가? 라파엘의 그림보다는 들라크로와 Delacroix(1798~1863, 프랑스 화가)의 그림이 진보한 것인가? 로망주의(romanticism) 의 예술보다도 원시주의(primitivism)의 현대 예술이 더 진보한 것인가? Hitler의 정치철학은Marx의 그것보다도 진보한 것이며, Napoleon의 사회개혁보다는 Stalin의 사회개혁이 더 진보한 것인가? 그런 이야기는 전연 성립이 안된다. 감정에는 고저가 있고 굴곡이 있고 유행의 밀물 썰물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진보란 관념조차 적용될 수가 없다, 한복, 중국 옷, 일본 옷을 진보와 퇴보의 자로 잴 수는 없고, 영국의 정치제도와 미국의 정치제도를 진보와 퇴보로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 반면에 과학에는 고전주의도 로망주의도 자연주의도 이상주의도 없다. 과학에는 감정은 없고 성분과 분량만이 있다. 과학에 대한 노력도 그 노력에 대한 댓가도 오직 정성적인 정량적인 진리의 탐구 그것뿐이다. 이 진리란 성인들이 찾는 거룩함 Das Heilige 이나 사상가들이 찾는 최고선(suoerme good) 과는 다른 면에서의 진리이지만, 인간의 창조능력을 한량없이 증가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 과학이고 기술이고 기계이며, 여기에서만 인류 문명은 진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진보가 반드시 선(good)이 아님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으나 아무튼 인류를 원시와 야만에서 문명과 개화를 만든 원동력은 “연모를 만드는 동물” tool making animal 로서의 창조 능력을 빼 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이것은 물론 “수동 물레는 봉건제도를 낳았고, 증기기관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Marx 의 「철학의 빈곤」(1847)을 되풀이 하는 소리가 아니다. 빈곤한 철학의 소유자 Marx 는 그 수동 물레나 증기 기관이 인간의 idea 의 발달, 인간의 창조능력의 진보에서 온 것을 모르고, 그저 물질적 생산력이란 것이~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의 변화랑 것이~땅에서 솟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려는 편견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점을 억지로 무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인간의 두뇌가 기계기술의 발달과 진보를 통하려, 오늘의 과학 문명시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이 종교보다 도덕보다 예술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과학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에게 행복을 약속한다는 18세기 일의 “진보에 대한 우상” 숭배를 되풀이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인류문화사에서 정신사만 중시되고 과학사는 빠져버린다면 그것은 인류문명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양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는 현대의 과학과 발명이 열어 놓은 넓은 새 시야를 똑바로 이해해야 할 만큼 과학사를 별도로 배워야 하며 정신사와 과학사가 똑같이 밸런스를 맞춰가야 된다는 것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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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를 만드는 동물
연모를 만드는 동물

인간의 생활환경을 아주 크게 갈라보면 몇 개나 될까? 흔히 우리는 그것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사회과학적 관계)와 인간 대 자연의 관계(자연과학적 관계)의 둘로 보기가 쉽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착오이며, 사실은 하나 더 인간 대 초자연의 관계(종교적 신학적 관계)를 보태서 셋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유신론적 입장에서나 무신론적 입장에서나 간에 다 초자연과의 관계를 일상생활의 중대한 한 면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양도 반드시 인간 생활환경의 이 3대 관계를 경중 없이 다루어 가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가끔 혼선을 빚어내는 수가 많다. 그것은 사회도 자연도 초자연도 다 인간 중심의 문제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방수벽으로 이것을 3개의 감방에다 분리시켜 놓는 데서 나오는 잘못이다. 종교나 예술이나 과학은 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다 같이 어떤 의미로서는 자연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인 동시에 또 어떤 의미로서는 다 같이 자연에서 추상화된 초자연으로 승화하려는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의 연구와 인간의 연구는 같은 명제에 불과하다. 인간에서 떨어진 인간도 없고 자연에서 떨어진 인간도 없다. 사실 과학이란 자연의 인간적 반사에 불과한 것, 인간의 거울에 비춰진 자연이 바로 과학이다. 인간을 연구하건 과학을 연구하건 그 연구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자연이 자연을 연구한다는 착각을 가져서는 안 되며 자연의 인간적 반사인 과학이 참되려면 역시 그 거울이 진짜라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결론은 언제나 인간이 내리는 것, 수학이 아무리 순수해 보여도 그것이 인간 심정의 표현 이상일 수는 없는 것 따라서 모든 과학이 다 인간성을 짐지고 가는 것이지 별게 아니다. 따라서 연모를 만든다는 그 자체도 인간성의 표현이며 그것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창작력의 발휘이며 또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인생에 관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절대로 가질 수 없고, 과학의 부호를 모르고도 오늘날 우리가 지구상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로 가질 수가 없다. 또 종교를 모르기 때문에 종교를 욕하는 과학자와 같이, 과학을 모르기 때문에 과학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살 수도 없다, 우리는 한자(漢字)를 모른다고 「당시 唐詩」를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과학의 부호를 모른다고 과학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버릴 수도 없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갈증, 황금에 대한 갈증, 사랑에 대한 갈증을 갖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지식에 대한 갈증을 가져야하며, 또한 갖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도 과학에 대한 상식, 과학사에 대한 지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항상 보수적인데 비해서 연모를 만드는 동물로서만이 인간은 항상 변화와 진보를 찾으며 항상 소 혁명가가 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언제나 암흑을 깨뜨리고 우리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구분을 뚜렷이 하려고 든다. 물론 인간에 어수룩한 구석이 남아 있는 것도 좋은 것이며 시(詩)의 세계는 깨뜨리지 말아야 하며 과학이 신비의 세계를 다 파헤칠 수 있는 것도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에 변화와 혁신이 없이 인간이 진보할 수는 없다. 종교가도 예술가도 과학자도 없으면 인간은 곧 동물화 되어 버리고 만다. 성인이 없으면 죄만이 남을 것이요 예술가가 없으면 추할 것만 남을 것이요 과학자가 없으면 정지와 침체만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과학자는 창조활동의 첨단을 걷는 사람이요 또한 인생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는 존재다. 사실 인간성에 어긋난 자연과학이란 존재할 수도 없다. 한 마디로 과학자도 종교인이요 시인이요 작가요 화가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자는 비문화인이라는 누명을 벗어야 하며 문화인은 비과학적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도 우리는 과학사를 진짜 역사적 통찰력을 가지고 배워야 한다. 나는 역사학의 기초위에 선 과학자가 과학사를 써 주기 바라며 또한 모든 학생들이 필수교양으로서 과학사를 읽는 것이 연모를 만드는 동물인 인간이 타고 나온 본분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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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회적 동물
정치적 사회적 동물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수수께끼다. 인간처럼 인간에 대해서 불가사의한 존재는 없다. 더구나 생각하는 갈대인 인간, “나는 생각하는 고로 나는 존재”하는 인간,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 지 아무도 아무런 협박으로도 알아 낼 재주가 없는 영원한 Sphinx의 미소이다. 그런데 그는 또한 다른 동류의 협동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면서도 Kant의 말대로 “비사회적 사회성”(unsocial sociality)을 잔뜩 지닌 존재. 그래서 그는 항상 도덕 · 정치 · 경제 · 법률의 거미줄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인간이 만일 사회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면 문제는 많이 간단해 질 것이다. 또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해서 Sphinx가 아니었더라도 문제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인간은 남과 같이 안 살고는 못 배기는 주제에 남과 같이 저절로 살 수 있도록 태어나지를 못했다. 항상 이기적인 개인주의자요, 항상 시기・질투・사리사욕 투성이로 남을 짓밟고 넘어가려는 집념이 본성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원죄(Original Sin)의 자식이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선 그의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인간관계(human relation)에 하자가 생기기 시작하면, 그는 자기가 꾸미는 일도, 연모를 만드는 일도 다 삐뚤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 교양은 역사에서도 철학에서도 과학에서도 쌓아져야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회생활・대인관계에서 잘 실천되어야만 할 것이다. 진리의 탐구란 기쁨과 겸손으로만 이루어진다. 항상 눈살을 찌뿌리고 살면서 진리를 탐구할 수는 없고 항상 빈 양철처럼 소란만 피우면서 사회에 이바지할 사람이 될 수 없다.

겸허한 구도자의 정신 그것은 과학자나 종교가나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냉철 · 진지 · 극기의 정신은 성자를 만들고 과학자를 만든다. 진정한 과학자는 진정한 종교가와 같이 겸손한 가운데 낙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인력의 법칙”으로 우주를 뒤엎어 놓은 새 물리학의 아버지 Newton은 자기의 업적을, “진리의 무변대해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작은 조개껍질 하나를 주워서 기뻐하는 어린이의 기쁨”에다 비했다. 진정한 종교가의 관심이 이기적인 목적을 떠난 진지한 인생문제의 해결이라면 진정한 과학자 역시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통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생문제의 진리를 찾고 있는 그것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실마리를 발견했을 때 다 같은 크나큰 기쁨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의 교양은 지극히 통합적인 것이라야 한다. 교양은 절대로 학생들을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 나무의 여러 가지들, 한 가지의 여러 잎사귀들, 한 가지에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여러 개 달린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통일성, 인간성의 종합, 그것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교양이다. 결국 교양이란 인간 입문, 교양이란 homohumanize 하는 것. 그것은 인류를 전진시키는 모든 창조적 활동에로의 초대인 동시에, 감사와 존경으로 과거를 우러러보게 하는 추념에로의 초대인 것이다. 이 회고와 전망은 사실은 상호보충적인 것이며, 젊음의 창조력에 밑거름을 주는 일, 그 한 가지뿐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명심하자, 인생에는 평화는 없고 오직 투쟁뿐임을. 삶은 투쟁이요 평화는 죽음이다. 이것은 호전주의자의 망상이 아니다. 진정한 평화애호자와 호전주의자의 차이는 전쟁과 평화의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 목적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인생은 투쟁, 평화는 투쟁의 산물, 공자(孔子)는 도(道)를 구하기 위하여 70 평생을 자기 수양을 위하여 싸웠던 결과, “내 마음먹은 대로 해도 법도를 거슬리지 않더라”는 경지에 도달했고, 간디는 인도의 해방과 백인의 착취를 내쫓기 위하여 평생을 불복종으로 싸웠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순례자의 행진과 같고 순교자의 기록과 같은 것. 가만히 앉아서 주는 밥 먹고 놀고 잠자고 한 사람만 살았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50만 년을 가도 공백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투쟁해야 하나다, 그 투쟁은 자기 수양의 투쟁, 자기 건설의 투쟁, 그리고 바람직한 인류사회를 꾸미는데 나도 한목 이바지할 수 있는 투쟁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교양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종신 수양을 뜻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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