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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심리학] 인간의 본성과 교육
작성자 : Edu연구소1   조회수 : 2084

인간의 본성과 교육

                                                                     

  인간의 문제를 떠나서는 교육의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다운 사람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의문은 교육현상 가운데 최대의 관심사이다. 교육이 추진하는 바가 인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교육에 관한 학문은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관심은 사물이 아닌 인간이다. 따라서 교육의 계획과 실제가 올바른지 알아보려면 교육받을 사람을 생각해야한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은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명제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 자아실현적인 존재, 전인적 성장의 존재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다운 인간’을 위한 교육은 교육의 본질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형득·한상철, 1995).

  수많은 철학자들과 현인(賢人)들 또한 ‘인간다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해 왔다. 루소(Rousseau)는 실질도야(實質陶冶)에 앞서서 일반인도야(一般人陶冶)를 주장하고, 인간교육이 직업교육이나 기술교육에 앞서서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술인이나 직업인 그밖에 어떠한 인물이 되기에 앞서서 먼저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 답이 없다는 것은 관점을 바꾸면 인간이란 그만큼 다양한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면적이고 여러 차원의 본질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의문은 철학·심리학·사회학·생물학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과학적이고 보편 타당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논리적인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인간을 일괄적으로 개념화하여 정의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다양한 면과 여러 차원의 동시 통합적 존재이지 어느 한 면이나 유일한 차원만의 존재는 아니다. 인간성을 개발하고 육성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형성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할 때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정보화사회의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전통적인 인간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에 대한 소박하고 원초적인 이해의 관점은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性善說) 악한가(性惡說)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가(不善不惡說)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하였다. 그 논의의 결과는 교육의 전개형태에 큰 영향을 주었다.


 1. 성악설(doctrine of innate badness)


  성악설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 도덕적으로 악한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도록 되어 있으며, 만일 교육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악한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고 보고 있다. 성악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경우는 순자(筍子, B.C. 315-230)와 고대 히브리인의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과는 상반된 극단의 사상을 가지고 사람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려 하며(好利),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려 하며(嫉惡, 질오),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려는 감각적 욕망(好聲色, 호성색)’이 있으니 이런 것들을 그대로 두면 무절제해져서 사회규범으로 지켜야 할 예의나 도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성악론을 전개했다.

  순자는 인간을 욕구적 존재로 파악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욕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정된 재화를 놓고 다른 인간들과 무원칙적으로 경합한다면, 사회는 혼란과 투쟁의 도가니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순자는 성악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혼란과 투쟁의 상황 속에서, 소수의 인간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무리를 떠나 홀로 살고자 하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혼자서 조달해야 하므로 궁핍한 생활을 면할 수 없고, 강한 이빨과 발톱을 가진 자연의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도 어렵게 된다.

  서양문화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의 교리도 인간본성을 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악한 본성을 물려받은 채 출생하게 된다는 원죄론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로서, 이 교리는 5세기경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래 크게 부각되어 16세기의 캘빈에 의하여 극단적인 성악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에 의하여 대다수 서양 사람들은 오랫동안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믿었다.


2. 성선설(doctrine of innate goodness)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맹자와 Rousseau를 들 수 있다.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시비를 가리는 마음인 사단(四端)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이라도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이 아이를 건져놓는다는 주장으로 모든 인간이 ‘사단’이라는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흉악범이라고 하더라도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해놓는 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이득이나 명예심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측은하여 인간으로서는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부처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즉 불교에서 보는 인간은 모두가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성선설의 입장이다.

  서양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견해는 18세기 중엽 루소(Rousseau)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의 저서 「Emile」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는 어질고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성인으로부터 오염되어 악하게 된다.’고 진술하여 인간은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성인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어린이는 착하고 자유롭게 민주적인 방향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을 식물에 비유하면서, ‘성인이 어린이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착하고 친절하며 민주적인 방향으로 자연히 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나 교사는 어린이가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하고, 억압됨이 없이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일상경험을 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Rousseau의 주장은 어린이를 혹독한 훈육에 의해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공헌한 셈이다.


  교육의 필요성과 성선설·성악설과의 관계를 보면 인간의 본성을 어느 입장에서 보든 교육의 필요성은 강조된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수용한다면 사람은 교육의 힘에 의해서만 선한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고, 성선설을 수용한다면 선한 마음이 악으로 물들지 않게 환경을 정선해 주어 선한 본성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교육은 필요하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악한 본성을 나타낸다는 생각은 엄한 규율을 가지고 훈육을 시키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적인 성향을 제압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엄격한 훈육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교육은 체벌중심의 금욕적이고 훈육적인 형태로 전개되며, 교사가 학생을 엄하게 구속하고 통제하는 교사중심의 교육으로 전개된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 자기수양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인간이 선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자기수양을 통해 덕을 키우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으며, 또한 아무리 악하게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교육과 법을 통해 악을 몰아내면 짐승과는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근본에 있어서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모두 후천적인 환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데는 차이점이 없다. 아무리 좋은 씨를 가지고 선하게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열악하다면 악하게 될 것이고, 아무리 나쁜 씨를 가지고 악하게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좋으면 선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환경은 인간의 심성을 결정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결정인자인 셈이다(최창호, 1995).


3. 무선무악 백포설(無善無惡 白布說)

 

  공자보다 조금 늦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墨家)의 시조인 묵자(기원전 약 480-420년)는 인간의 심리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요인을 교육과 환경으로 꼽으면서 인간을 아무 색채도 띠지 않는 비단천에 비유하였다.

  묵자는 무색의 비단을 가지고 후천적 요인이 인간의 심리발달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강조했는데, 이것이 ‘백포설’이다. 묵자는 흰 비단에 물을 들이는 것과 같이 사람의 심리발달도 환경과 교육에 의해 물들여져 형성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묵자는 ‘푸른빛으로 물들이면 비단을 푸른색으로, 노란빛으로 물들이면 노란색으로, 비단을 어느 염색 항아리에 집어넣는가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그러므로 물들이는 것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묵자는 여기서 단지 염색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고 교육을 실현해 나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면서, 사람의 본성은 아무 색깔도 띠지 않는 비단과 같아서 그것을 어디에 담그느냐에 따라 다르게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묵자의 이러한 사상은 17세기 후반 Locke(1632-1704)의 백지설보다 무려 2,000여년이나 앞서서 전해져 온 인간 이해의 사상이었다(박인숙, 1997 : 84-88). Locke는 서양의 전통적인 기독교적 성악설에서 루소의 성선설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주장으로서 백지설(Tabula Rasa)을 주장한 것이다.


  별첨 1: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가 악하게 태어나는가.


  인간이 선하게 태어나는가 악하게 태어나는가에 관한 논쟁과 비슷한 인간관에 대한 논쟁이 심리학에도 존재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심리학에서의 논쟁은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인간이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맥그리거(Douglas McGreger)라는 심리학자는 두 가지 이론을 주장했다. 하나는 부정적인 인간관인 X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인간관인 Y이론이다.

   부정적인 인간관인 X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게으르고 일을 하기 싫어하며, 맡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남으로부터 지시받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성을 중시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조직의 요청에는 무관심하고, 창조성이 없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X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엄격한 감시와 통제, 상세한 명령과 지시가 필요하고, 의사결정이 상층부로 집중되는 피라미드형의 관리조직이 필요하다. X이론은 마구 다그쳐야 돌아간다는 순자의 성악설과 유사한 인간관이다.

   긍정적인 인간관인 Y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동기화만 된다면,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Y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으로부터의 지나친 간섭이나 통제를 받게 되면 오히려 동기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자율성을 강조하는 팀별 운영이나 위원회별로 운영되는 관리조직이 필요하다. Y이론은 다그치지 않더라도 돌아갈 건 다 돌아간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유사한 인간관이다.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치제도, 사회제도, 인사관리, 작업관리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인간관에 관한 논쟁은 인간의 인성을 얼마나 과학적으로 연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최창호, 1995). 


4. 생물학의 인간관


  인간은 하나의 생물이다. 생물계 안에서 인간이 어떤 생물학적인 특이성을 가졌다면 그것은 인간학의 재료가 된다. 인간은 다른 생물처럼 양성의 결합을 통해서 종자나 난자로부터 성장하고 성장기를 갖고 있다. 다른 포유동물처럼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성장은 정지된다. 인간의 성장도 생물학적인  단계를 거친다. 다른 포유동물처럼 서서히 자라나서 또한 서서히 노쇠 한다.  동물이 무리를 지어 생활하듯이 인간도 유군(affiliation)현상을 가지며 집단생활을 영위한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고정된 생활질서를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사회질서를 따른다. 동물과 인간은 다같이 질서 있게 새끼와 자녀를 기른다. 동물의 새끼들도 그들이 스스로 활동해서 먹이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양육되어야 한다.

   우리는 생물계에서 교육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서 인간교육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곧 양육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서 본능적인 보호를 통해서 동물의 하나가 자라난다. 이렇게 자란 동물은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고 다시 미숙한 동물을 기른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육현상은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관찰하면 다른 동물에 비해서 특수한 환경에 기계적으로 적응하고 생존경쟁에 승리할 만큼 완전한 육체적인 기관들과 기능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생명을 지닌 생물체로서 일정한 환경 안에서 적절히 적응해 가면서 생명을 유지해 간다. 따라서 인간도 기본욕구를 지닌 동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생물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조기출생론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과 비교하면, 너무 일찍이 세상에 태어난다. 따라서 앞 세대에 장기간 의존해야 하며, 이 의존기간 동안에 앞 세대의 경험을 익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첫째,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에 비해 일찍 출생하므로 “자궁 밖에서의 1년”동안 다른 포유동물이 태내에서 받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자궁 밖에서의 1년간의 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생아는 다른 포유동물의 새끼에 비해  무력하다. 그래서 다른 포유동물들은 둔소류(遁巢類: 부화 후 곧 둥지나 소굴을 뛰쳐나올 수 있는 새나 닭 따위)에 가깝지만, 인간은 유소류(留巢類: 태어난 후에도 오랫동안 집에 머물러있는 새나 비둘기 따위)가 된다.

  둘째, 인간은 하나의 개체로 성장하기까지 다른 동물에 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경우 성숙하기까지는 20년 가까이 걸린다. 그래서 성적 성숙의 연령을 지나서까지도 성장한다. 그런데 고래는 2년만에 그의 완전한 크기인 20M에 이른다고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성장의 리듬이다. 인간은 첫해에는 유인원보다 비율로 보면 2배나 성장한다. 인간은 이 첫해에 유인원이 태아기 동안에 성장한 것을 만회한다. 이 첫해의 강력한 성장으로 뇌는 ―인간의 뇌의 크기는 유인원의 3배에 달한다―이미 조기에 상당히 발달할 수 있다. 나아가 포유동물은 처음에 태아기와 유년기에 강력한 성장을 하지만, 그 후에는 성숙한 존재가 되기까지 성장속도가 계속 감소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와는 달리 처음에는 어느 정도까지 포유류와 비슷하게 성장하다가, 2세부터 9세에 이르기까지는 성장속도가 약해진다. 그러다가 10세부터 16세에 이르는 시기에 인간의 성장곡선은 갑자기 다시 높이 뛴다.

   이렇게 인간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 생물학적으로도 다르다.  다른 동물의 행동은 자연적 본능의 조정만을 받는 데 비해, 인간의 행동은 어린이나 미성숙자가 그 속에서 크는, 크게는 사회집단이라는 객관적인 정신과 규범, 즉 “제2의 본성”이라는 문화의 조종을 받는다. 인간은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거꾸로 많이 배워서 강하게 되는 소질을 지녔다 할 수 있다.


2) 결핍존재론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생물학적인 면으로만 보아도 아주 약하고 모자라고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결핍존재이다. 인간은 기관이 전문화되어 있지 않아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렵고, 본능이 약하게 작용하고, 더욱 유아는 모체의 보호를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첫째, 기관의 비전문화이다. 소는 채식을 하기에 알맞게 어금니가 발달되어 있고 늑대는 육식을 하기에 알맞게 송곳니가 발달되어 있으나 인간의 이는 채식도 육식도 할 수 있게 어금니와 송곳니가 다 발달되었다.

   둘째, 약한 본능이다. 유전적인 것보다 획득적인 것이 더 강함을 이름이다. 동물의 모든 감각은 성과 먹이의 충족을 위해서만 발달되어 있으나 인간은 이와는 달리 획득적인 것(문화)이 더 강하며 이것으로 본능까지도 억제할 수 있다.

   셋째, 모체에의 의존성이다. 이는 위의 조기 출생론에서 서술된 것이다.

  이 같은 기관의 비전문화, 약한 본능, 앞 세대의 의존성은 얼핏  보기에는 인간을 동물보다 약한 존재로 만들 것 같지만, 인간은 역설적으로 이 약함을 보상하는 것을 발견하여 본능의 힘에 의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발전하여 왔다. 예컨대, 왼 팔을 부상으로 잃은 사람은 대신 오른 팔이 억세져 왼팔의 약함을 보상한다. 인간의 이런 무력함을 보상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성이다. 이성은 이 전문화의 대비개념이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전문화가 진행되면 인간은 이성을 상대적으로 잃게 되고, 거꾸로 전문화가 덜 진행될수록 인간은 이성을 더욱 갈고 닦게 된다는 논리가 나온다.


3) 심리학의 인간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심리학의 해답은 세 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행동주의 인간관으로서, 인간을 반응하는 존재로서 파악하며 다른 모든 유기체와 다를 바 없는 반응체로 보는 견해이다. 어떤 자극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어떤 행동이 형성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관점으로서, 인간행동의 형성에 있어서 환경 요인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학적 인간관으로서, 인간행동의 이해는 인간의 심층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통찰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행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의식적인 자아에서 발생된다기보다는 무의식적인 충동에 의해 발생한다고 본다.

   또 다른 하나는 인본주의적 인간관으로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라는 견해이다. 인간은 목적이 있는 존재이며, 인간행동은 과거의 선행조건에 의하여 결정된다기보다는 개인의 이념과 목적, 가치와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미래지향적이며 의식적인 존재가 인간이라고 본다.

  위의 세 가지 인간관들은 모두 제각기 어느 단면들에 치중하여 인간을 파악하려 함으로써, 인간 전체를 보는 관점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입장을 취한다. 행동주의 인간관은 인간행동에 대한 환경의 영향을 중시함으로써, 정신분석 인간관은 무의식적 충동의 힘을 경고함으로써, 인본주의적 인간관은 자유의지와 의식적인 사고를 강조함으로써 나름대로 인간을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중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만 파악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면적인 전체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행동주의 인간관


   행동주의(behaviorism) 심리학은 인간은 자극에 대해서 반응(response)하는 존재로 본다. 즉, 인간을 뛰어난 기계(super-machine)로 간주하고 복잡하기는 하나 원칙적으로 행동의 예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행동주의 접근에서 심리학자는 사람의 내적인 작용들보다도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연구를 한다. 행동이 심리학의 유일한 주제가 되어야 된다는 관점은 1900년대 초 와슨(Watson)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Watson은 심리학이 과학이 되려면, 그 자료는 관찰 가능하고 측정 가능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지각이나 감정은 자기 자신만이 관찰할 수 있으나, 행동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관찰할 수가 있다.

  행동주의자들은 교육이란 어린이로 하여금 주어진 자극에 계획된 반응을 하도록 조건화하는 것으로서 교육은 동물훈련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Waston은 복잡한 인간활동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행동은 조건화(conditioning)의 용어로서 설명될 수 있고 인간의 행동은 내부로부터의 동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인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5) 정신분석학 이론


   Freud(1856-1939)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세계는 의식(consciou-sness), 전의식(preconsciousness : 잠재되어 있으나 노력하면 의식이 될 수 있는 부분), 무의식(unconsciousness)의 세계가 있다.

  무의식은 이따금씩 화산이 분출하듯이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식의 표면을 뚫고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Freud는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자기 사고의 전부라고 생각해왔던 의식이 사실은 빙산의 부분에 불과하고 오히려 의식의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무의식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더구나 무의식도 의식처럼 나름대로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욕구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Freud가 발견하고 다듬은 무의식은 정신분석학과 심리학뿐 아니라 철학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마르크스가 인간 존재의 물질적 토대를 분석하는데 공헌을 했다면 Freud는 인간존재의 정신적 토대를 분석하는 틀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이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들 두 유태인은 20세기 지성사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은 무의식적 충동, 즉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조정 당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단순히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데 관심을 갖는 존재로 가정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즐거움만을 구하는 본능적 욕망을 조절하는 억제력을 길러야 한다.

  기본적으로 프로이드는 인간을 보는 두 가지 대립되는 관점들―성선설과 성악설―중에서 성악설의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프로이드는 성악설의 관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루소의 성선설을 뒤집었다. 프로이드는 개인의 삶을 갈등적인 충동들의 투쟁사로 보았고, 인간사를 무의식적인 자아와 사회적 자아간의 끊임없는 투쟁사로 보았다.

   Freud의 인간 본성관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인간은 동물과 동일한 기본적 본능(성, 공격)에 의해서 좌우되며 이러한 충동들을 통제하는 사회에 대하여 끊임없이 투쟁한다. Freud는 공격이 하나의 기본적 본능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계속해서 평화롭게 함께 살아갈 가능성에 대해서 비관적이었다.


6) 인본주의 인간관


  인본주의 심리학은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인간의 주관성과 독특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과거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고 인간의 현재 행동은 과거의 어떤 앞선 조건이 결정해 주기보다는 그가 지니고 있는 이상, 이념, 목적, 가치체계가 결정해 준다는 견해를 나타낸다.

  개인의 의미, 목적, 깨달음, 경험 등과 같은 인지요인들이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인본주의자들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인본주의자들이 보는 인간이란 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초월할 수 있고, 높은 차원의 도덕적 원리를 지지한다. ② 인간은 때때로 내적인 힘, 환경적인 힘의 영향을 받기도 하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선택한다. ③ 사회에 의해 정해진 가치는 종종 제한되고 억압되기 때문에 숭고한 도덕적 원리와 항상 일치하지 않으며 도덕적 성장은 반드시 사회에 순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도전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본주의자들은 정신분석학자나 행동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을 이성적이며 정서적인 존재로 신뢰하고 있다. 인간은 성장함에 따라 통합적인 인격을 갖게 되고 그 자신을 도덕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평가 준거를 스스로 갖게 되며 타인들과 더불어 자신들을 윤리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가치 선택을 사회에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가 정립한 도덕적 원리에 의해 결정하게 된다. 개인적이고 상황적인 가치 선택을 통하여 조화적이고 창조적이며 행동적인 가치체계를 수립할 수 있으며 통합과 조화를 위해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갖는 것이다.


7) 정보화사회에서의 신인간상 


  Toffler(1980)는 정보화사회를 인류가 맞이하는 ‘제3의 물결’로 규정하고 있다. 정보화사회에서는 산업의 서비스화와 소프트화가 진행되고, 미디어는 탈획일화하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는 생활양식이 나타나며, 권력의 지방분권화가 이루어지고, 계급과 국가의 존재가 무너지면서 인간중심의 사회가 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이 같은 낙관론은 기술발전이 곧 사회발전이라는 기술중심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술중심사상은 부를 확대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은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으로서, 이렇게 빈곤이 해소되고 나면 탐욕, 착취, 부정 등과 같은 행위는 사회적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어 모든 사회문제는 사라지게 된다고 보았다.

  정보화사회에서 고도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물론 다양한 욕구의 충족, 질병의 퇴치, 여가 생활의 확대, 생활환경의 개선, 자연환경의 보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에 적응하게 된다는 낙관론에 대신해서 인간이 기계에 적응하게 된다는 비관론도 제기되고 있다. 정보화사회에 대해서 극단적인 비관론은 현대 과학기술은 적용과정에 있어서 비인간화를 촉진하는 제어할 수 없는 본질적 힘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기술진보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도 동반한다는 것이다. 기술진보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기술적인 시각으로 보게 만들며, 따라서 기술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1) 신인간의 탄생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호모파베르(Homo-faber)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는 산업혁명을 전후해서 석탄이나 석유 같은 에너지체계를 개발하여 기계를 만들면서부터이다. 농경사회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간주되었으며 자연은 인간과 공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급자족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농민들은 자신과 가족이 먹을 양식이나 그 밖의 일용품들을 직접 만들었다. 따라서 이들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였다. 또한 개인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가족, 씨족 또는 부족과 같은 더 큰 공동체에 속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개인은 공동체의 삶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에너지라는 노예를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함으로서 자기의 나약한 육체적 힘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자연의 위력 앞에서 더 이상 무력해지지 않아도 되었다.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공장들이 생산품을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서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던 굶주림이 없는 풍요로운 사회에 대한 꿈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부터 이 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 존재가 한정되고 중요하지 않던 ‘시장’이라는 것이 우리생활의 중심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시장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산업사회에서 문화도 바뀌어 갔다. 상업위주의 타산적 문화가 역사에 나타났다. 이 문화에서는 제품뿐만 아니라 노동, 교육, 예술, 과학, 아이디어조차도 모두 매매, 교역, 교환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일련의 거래행위로 보게 되었다. 인간이 그 동안 내재적 욕구에 의해서 수단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해 오던 모든 행위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면서, 마침내 순수성을 잃고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가족 간의 유대, 사랑, 우정, 이웃과 지역사회와의 결연을 모두 상업주의에 물든 타산적 관계로 변질시켰다.

  상업본위의 문화는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도 변화시켰다. 그 결과 새로운 인간이 생겨났다. fromm(1947)은 현대 산업사회가 세 가지 유형의 사회적 성격을 빚어냈다고 보았다. 첫째, 착취유형으로서 주위의 모든 것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는 성격이다. 이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타인도 착취의 대상으로 본다. 둘째, 축적유형으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여 축적함으로서 거기서 성취감과 안전감을 느끼는 성격이다. 사랑도 소유하는 것일 뿐이다. 이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믿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신뢰도 없다. 셋째, 매매유형으로서 개인의 인격이나 자질에 대해서는 아무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인간을 단지 교환할 상품으로만 다루는 성격이다. 인격은 단지 팔 물건일 뿐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 내면이 공허감과 불안감으로 차있다. 그는 이 세 가지 성격의 유형이 모두 현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상업주의와 뿌리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들은 삶에 대한 소유적 태도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업주의가 낳은 사생아인 시장적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

  기계의 발명으로 대표되는 산업사회는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했지만, 인간성의 실종이라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부산물을 함께 가져왔다. 산업사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가지 교훈은 모든 기술혁명은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기술혁명을 통해서 축복 받은 내용과는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것에서 나타난다. 물질에서의 풍요가 인격에서의 황폐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제3의 물결로 지칭되는 정보화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어떤 유형의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킬 것인가? Toffler (1980)는 정보화 사회는 지구상에 ‘최초의 진정한 인간적 문명’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근거는 정보혁명을 통해서 모든 산업에서 자동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신노동자층이 늘어나며,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여가시간이 늘어나고, 노동환경의 소외가 줄어들며, 커뮤니케이션이 발달되기 때문에 국가나 기업의 조직의 규모가 작아지며 분권화되어 상대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이 신장되며, 이와 더불어 사회체제는 생산중심의 사회에서 생활중심의 사회로 바뀌게 되어 문화는 다원화되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Toffler는 정보화 사회에서의 새로운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부터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개성적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보다 일찍 성숙하고 젊을 때부터 책임감이 왕성하게 될 것이다.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풍부하고 자율성도 신장되어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도 양친 세대보다 격화될 것이다. 금전에 대한 욕망은 버리지 않겠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열심히 노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노동과 여가, 생산활동과 소비활동,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추상성과 구체성,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서 균형을 취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직면했던 상황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자기를 시험하고 외계로 향해서 자기의 꿈을 뻗어나갈 것이다”.

  미래의 인간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은 미래에 대하여 희망적인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 미래에 대한 이와 같은 예언을 한갓 무지개 빛 꿈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정보화 사회가 산업사회의 관료제화, 대형화, 획일화에서 탈피하여 분권화, 소형화, 다원화로 나아간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있다(Bell, 1984). 정보화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정보가 소수의 권력에 독점되면 Owell의 ‘1984년’과 같은 작품에 나오는 끔찍한 사회가 될 수도 있고, 인간의 지적능력을 대체하는 로보트나 고차원의 컴퓨터의 발전은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또한 고도의 관리사회가 탄생하게 되면 노동통제는 강화되고, 사생활의 영역이 축소되어 인간이 오히려 비인간화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단지 기계의 기억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판단력에도 의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지적인 능력의 한계가 있지만 기계는 계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그 능력을 무한정으로 늘려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기계가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류체계를 갖게 된다면 그 때는 인간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기계 스스로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계 앞에 인간은 무력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은 기계의 초인간적 능력 앞에서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고 결국은 기계의 판단 속에 안주해 버리려는 성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

  고차원의 컴퓨터가 출현할수록 인간에게 편리함은 더해 주지만, 지식의 생산자와 소비자사이 틈새 현상은 더 촉진된다. 여기서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분열이 되면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이 같은 변화를 보았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사이를 중재하는 기구가 필요하게 된다. 산업사회에서는 시장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보화 사회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기구는 결국 산업 사회에서처럼 시장, 여기서는 ‘지식시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시장은 그것의 생리상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따라서 지식도 필연적으로 상품화된다. 거기서 지식은 이미 개인의 인격의 한 부분이 아니라 팔고 사는 상품이다. 또한 시장은 앞에서 본 것처럼 스스로를 강화해 가는 기구이다. 시장은 처음에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시키는 기구로 나타나지만 어느새 자기증폭의 과정을 거쳐 생산자와 소비자를 지배하는 기구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이 교훈을 산업사회에서 심각하게 체험하였다. 시장은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상품화시킨다.

   인간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판단하는 모든 일들 즉, 정신에너지를 소모하는 모든 일들을 시장은 상품으로서 가치만 있다면 상품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시장은 사람들이 그 일에 쓸데없는 정신적 에너지를 더 이상 소모하지 않고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시장은 고객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또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상품의 생산 시스템을 고도로 분업화하여 전문화시켜 나갈 것이다. 정보화 시대가 될수록 지식의 폭발적인 증가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지식이 고도로 전문화될수록 개인은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며, 결국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기결정 능력은 점점 더 무력화되어 이를 시장에 맡기게 되는 것이다. 시장은 또한 소비를 늘려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서 이를 부채질할 것이다. 이 부채질은 시장이 일단 궤도에 올라 힘을 갖게 되면 무서운 파급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그 예를 산업사회에서 보았다.

   정보화 사회에서 시장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1차적인 목표 중에 하나는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 중에 하나인 자기결정능력, 즉 지식의 생산능력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 같은 자질은 시장의 논리에서는 상품의 구매력을 떨어뜨리는 장애물이 된다. 인간의 자기결정능력이 문제해결에 작용하는 한 시장은 그만큼 공신력을 잃게 되고 고객도 잃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시장은 자기결정능력을 공략하여 파괴하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네들이 만든 상품에 한 번 맛을 들이면 다시 그것을 먹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중독시킬 것이다. 그리고 사회구성원 전체가 여기에 중독이 될 때까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유혹과 세뇌를 할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질 줄 아는 인간이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이 같은 인간이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모든 결정을 시장에 맡기고 또한 그에 대해서 철저하게 고민도 하지 않는 인간이 정보화사회에서는 적응을 잘하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대접받게 될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이 같은 새로운 인간형을 ‘객체적 인간’이라고 잠정적으로 명명해 보았다. 여기서 객체적 인간이라고 한 것은 삶을 능동적이며 주체적으로 사는, 그렇기 때문에 의지도 있고 감정도 있는 인간과 대비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객체적 인간은 자신에 대하여 실존적 관심이 결여된 사람이다. 그는 자기를 자기의 세계의 중심으로서 또한 자기의 행동의 주체로서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내’ 경험, ‘내’ 사상, ‘내’ 감정, ‘내’ 결정, ‘내’ 판단, ‘내’ 행동 등과 같이 주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나 인격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또한 자신의 삶의 가치나 존재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같은 상태는 자기가 자기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주인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등장할 객체적 인간이란 지식시장이라는 우상 앞에서 ‘자기로부터 소외’된 인간이다. 그리하여 인격의 와해가 일어난 인간이다. 지식은 인격의 일부가 아니다.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일 뿐이다. 일회용 상품처럼 쓰고 버리는 것이다. 지식이 인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사고가 조직화되지 못하고 단편화된다. 감정에서도 사고와 분열이 일어나기 때문에 현실적 삶에서 느끼는 깊은 정서적 체험과 그것에 수반되는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능력이 쇠퇴한다. 그리하여 감각적인 쾌락이나 흥미만을 추구하게 된다. 사랑이나 미움에 대한 진솔한 인간적 체험을 느끼지 못한다. 의례적이고 피상적인 감정만을 느낄 뿐이다. 마치 기계가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냉정함을 잃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신과의 접촉을 끊고, 그 대신 외부로터의 자극에서 권태를 메꾸려 할 것이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비한다. 지식의 생산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비인간(Homo consumens)이 양산될 것이다. 그리하여 정보화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이 같은 객체적 인간들로 구성됨으로서 이들이 이제 그 사회에서는 적응을 잘하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간주될 것이다.


(2) 인간관계의 변모


   농경사회와 산업사회가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인간관계의 특징이 개인의 삶보다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삶에 보다 가치를 두고 있다. 유교의 효도사상, 조상숭배, 친족관계 등은 개인의 요구보다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요구가 우선적으로 존중되는 풍토를 조성했다. 이렇게 개인보다 가족을 우선하는 풍토는 자연히 개인의 행동기준을 공동체로 지향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요구나 목표가 나의 요구나 목표가 된다. 이 상태에서 나라는 개체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경계는 사라지게 되며 가족이 곧 나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적 인간관계를 이상적 인간관계의 모형으로 설정하여 이를 가족 밖의 사회적 인간관계에까지 확대시키려 한 것이 한국적 인간관계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산업사회의 물결이 들어오면서 이 같은 인간관계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공유적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사이의 오고 가는 정(情)이 메말라 간다는 소리가 높다. ‘情’은 인간 사이의 관계가 ‘너’와 ‘나’로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험하는 감정이다. 따라서 이 관계 안에서는 너와 나를 분리된 것으로 시인하는 표현은 용납되지 않는다. 情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시비를 따지거나 이해를 가리는 행위는 情떨어지는 행위로 배척된다. 이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시비와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다(이수원, 1987).

  그런데, 언젠가 우리 사회에도 ‘시장적 인간’이 나타나게 되었다. Marx가 한탄한 ‘노골적인 이해타산과 냉혹한 현금거래만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맺어주는 유대가 없는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가족 사이의 유대, 사랑, 우정, 이웃과 지역사회의 결연을 모두 상업주의에 물든 타산적 관계로 변질시켰다. 모든 인간관계를 이해타산의 교환으로만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을 한갓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인간관계를 ‘거래’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빚어내게 된다.

  사실 현대 산업사회가 빚어낸 시장적 인간은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들의 거래’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순수한 내재적 욕구에서 출발한 과학이나 예술이 교환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동안 인간의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덕성들, 사랑, 우정, 인격까지도 상품화시킴으로서 순수성을 잃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모든 현상은 산업사회가 등장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계문명의 도입은 인간만을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도 변질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새롭게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어떤 유형의 인간관계가 나타날 것인가? 이전 사회와 이 사회를 가름하는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축은 무엇인가?  이 사회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자기결정능력을 잃고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객체적 인간으로 묘사하였다. 이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미래를 낙관적으로 내다 본 Toffler(1980)는 정보화 사회의 인간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컴퓨터나 통신망의 발달로 사람들의 직접적인 접촉이 적어지게 되어 인간관계가 간접적이 된다는 것은 소박하고 순진한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오히려 거꾸로 될 가능성이 크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인간관계는 적어지지만 가정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더 긴밀해 질 것이다. 컴퓨터나 통신망은 공동체의 부활을 촉진시킨다. 컴퓨터나 통신망의 발달은 통근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통근은 우리를 매일 직장으로 내어쫓고, 사업상의 피상적인 교제로 시간을 보내게 하고, 가정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빼앗아 갔다. 사람들이 집에서 근무하게 되면 가족의 유대는 다시 강화된다. 더 따뜻하고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인간관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교제도 친밀하고 피가 통하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

  또한 그는 미래의 사회에서는 공상과학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전광 스크린이 인간관계의 역할을 대행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관계가 두 종류로 나뉜다고 보았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직접적인 접촉과 전자공학이 대행해 주는 간접적인 접촉이다. 그리고 정보화 사회에서는 이 두 인간관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생각했다. 인간간의 직접적인 접촉은 감정이 담긴 인간관계를 심화시켜 주게 되며, 전자공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접촉도 원격통신(telecommunication)을 통해서 쌍방적인 정보교환이 이루어져 인간사이의 접촉이 더 늘어나기 때문에 인간관계 형성에 장애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보화 사회는 공동체를 붕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정보화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촉진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던 몇 가지 첨단기술들은 오히려 인간관계를 더 비인간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 첨단기기가 발달되어 가정에서 직장 일을 보게 된다는 생각이 한가지 예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산업사회에서는 여럿이 함께 모여서 해야만 되던 일을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직장에서 가졌던 인간관계도 끊어져 개인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될 가능성도 있다.

  정보화 물결이 먼저 파급되고 있는 서구의 몇몇 선진국가에서는 이미 가정이 붕괴되어 가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전체 세대 중에 약 20%이상이 독신으로 살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혼율이 격증하고 있으며 이에 비례하여 독신주의도 증가하고 있다. 편모나 편부 밑에서 자라는 아동이 증가하고 있으며, 결혼을 해도 자녀를 갖지 않으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독신세대는 증가추세를 보일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첨단기기의 덕택으로 가정에서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또한 원격통신은 기기를 통한 간접적인 접촉을 촉진하지만,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접촉의 기회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직접적인 접촉은 직접 방문해야 하는 중간과정이 생략된 간접적인 접촉보다 불편한 방법이다. 따라서 그 같은 접촉은 간접적 접촉방법이 개발될수록 이용회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사이의 비인간적 관계를 조장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보다 기계와의 접촉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전 사회에서는 주위의 중요한 타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개인의 사회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기계와의 접촉을 통한 사회화는 인간을 기계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Marx는 그의 「경제 철학수기」에서 ‘기계가 인간의 약점에 이용되는 것은 약한 인간을 기계로 바꾸기 위한 것’이라는 무서운 말을 하고 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만남이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가정은 붕괴되어 가고 있으며 독신자는 늘어가고 있다. 자식들로부터 고립되어 홀로 사는 노인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은 양로원에서도 대화상대가 없어 컴퓨터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청소년들의 자살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마약이나 범죄에 빠져드는 청소년도 격증하고 있다. 고독감과 우울증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사교(邪敎)나 신흥종교에 이끌려 들어가는 가정주부들도 늘어나고 있다. 邪敎는 고독감을 래주는 도피처가 된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심리요법에 의존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고 있다. 동양의 신비적 종교, 신앙부흥운동, 정신분석, 초월적 명상, 감수성 훈련, 신앙적 정신요법 등이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이 그 어느 시대보다 인간사이의 단절과 고독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오늘날 고독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역설적인 표현으로 ‘고독이야말로 현대인의 참다운 모습이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 고독은 현대인의 공통된 체험이고 수치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 사이에서 고독이 열병처럼 번져가고 있는 것인가? 1차적 원인은 사회가 산업화하면서 시장적 인간이 탄생하여 농경사회에서 구축된 인간공동체를 붕괴시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인간관계가 공유적 관계에서 교환적 관계로 바뀌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독이 열병처럼 번져가는 현상은 탈산업사회를 지향하는 일부 선진국가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현상은 현대사회의 인간관계가 교환적 관계로 바뀌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현대사회가 정보화사회로 돌입되면서 이전 사회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관계 유형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유형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정보화 사회가 이전 사회와 구별되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축은 주어진 인간관계가 인격적(personal)인가 비인격적(impersonal)인가에 있다고 보았다. 인격적 관계란 Buber의 표현을 빌리면 ‘나’와 ‘너로 대표되는 인간관계로서, 관계 속에 있는 두 사람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반면에 비인격적 관계란 ‘나’와 ‘그것’으로 대표되는 인간관계로서 두 사람의 관계는 사물과 사물의 만남으로 나타나게 된다. 비인격적 관계란 관계 속에 있는 두 사람이 만남에서 인격적 체험을 느끼지 못하는 관계다. 여기서 인간적 체험이란 나에게 인격이 있는 것처럼 상대의 인격도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느끼는 체험이다. 이 같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체험 가운데 하나는 관심이다. 관심은 자기 마음을 열고 상대의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이다. 거기서 인간성의 고유한 특성인 공감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공감은 상대방이 느끼는 것을 자기도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이라든지, 동정이라든지, 인정과 같은 인간적 체험을 갖게 된다. 관계 속에 있는 두 사람이 이 같은 체험을 공유할 때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정보화 사회에서 탄생하는 인간은 자기결정능력을 상실하여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관심은 인간의 능동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그의 삶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수동적 인간은 타인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타인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서 그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할 수는 없다. 또한 이렇게 타인의 기쁨과 아픔이 공감되지 않을 때 사랑이나 동정 같은 감정도 기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정보화 사회에서는 인간적 체험에 바탕을 둔 인격적 만남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정보화 사회에서는 인간관계의 유형이 인격적 관계보다는 비인격적 관계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인간사이의 비인격적 관계를 더 조장하는 것은 개인의 사회화가 인간과의 접촉을 통해서 보다는 기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기계와의 접촉은 인간을 기계처럼 만들 수도 있다. 기계와 접촉함으로서 인간사이의 접촉도 기계와 접촉하는 방식대로 접촉하려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과의 접촉에서 감정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는 배제시키고 기계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접촉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이 같은 가능성은 원격통신과 같은 첨단기기의 도입이 인간관계에서 정서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은 약화시키고,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에서도 뒷받침된다.

  인간에게 물질적 축복을 가져다주는 기술혁명이 인간관계에서는 반드시 축복만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육체적 힘을 확대시켜 주는 기계가 나타나면서 인간관계는 공유적 관계에서 교환적 관계로 변질되었다. 이어서 인간의 지적능력을 확장시켜주는 기계가 나타나면서 인간관계는 인격적 관계에서 비인격적 관계로 변질될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볼 때 이 같은 인간관계에서의 변질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치러야할 대가일 수도 있다.

   정보화 사회는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순기능과 역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보화 사회는 인류가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켜질 것 같다. 그러나, 그 대가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이 같은 교훈을 경험했다. 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물질적 풍요를 이룩한 산업사회는 인간에게 축복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동시에 가져왔다. 따라서 첨단기계 위에 구축되는 정보화사회도 그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만일 대가를 치르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성의 상실로 나타나게될 것이다. 산업사회를 통해서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빈곤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배웠다. 사실 그와 같은 징조는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탈산업사회로 진입한 몇몇 선진국가에서는 이미 고독이 사회에 만연되어 우울증이나, 자살, 변태, 마약중독 같은 정신적 질환이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혼이나 가정파탄이 급증하여 마지막 하나 남아있는 인간 공동체였던 가정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첨단기술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누리면서 인간성이나 인간관계에 미치는 역기능을 최소화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 기술이 갖는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고 우리자신이 설계한 미래에 대한 비전에 의해서 미래를 이끌어 가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축적되어 온 우리의 문화전통을 계승․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여기에 접목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정보화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기술이나 제도는 바뀌었으나 인간의 가치나 이념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은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특히, 정보화사회에서의 역기능 즉, 인간성의 상실과 이에 따른 인간관계의 비인격화는 우리의 문화전통에서 나타난 인간상이나 인간관계와 서로 맞물려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같은 도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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