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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정학] 돌아 온 탕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작성자 : Edu연구소1   조회수 : 496

돌아 온 탕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금의 알제리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인으로 충직한 공무원이었으며, 어머니 모니카는 기독교 신앙이 몸에 밴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32세 되던 해 어머니의 끈질긴 간청에 회심(回心, 과거의 생활을 돌이켜 신앙에 몰두함)하여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있었다. 어린 시절엔 공부를 몹시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했고, 청소년 시절엔 도둑질(과일 서리)도 일삼고 성적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값싼 정욕에 휩쓸리기도 하였다. 20세도 채 안된 나이 때는 아버지의 뜻(법률과 수사학 공부)을 거역하고 시와 연애를 즐기며 쾌락을 즐겼다. 심지어 동거녀 사이에 아들을 두기도 했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인 마니교(3세기경 마니가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불교를 통합하여 창시한 종교로써 세상에는 착한 신과 악한 신이 있다고 한다. 세상이 악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어머니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종교-에 깊이 빠져들기도 하였다.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당시 행동은 나는 어머니의 젖을 빨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어머니의 신앙(기독교의 신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완벽히 선한 존재라는 믿음으로 악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의 선한 의지를 저버린 인간의지의 나약함이 만든 것)과는 많이 어긋난 것이었다. 알제리에 있는 히포 레기우스의 대주교(大主敎, 한 지역 이상 또는 많은 교구를 관리 감독하는 주교)가 된 396년부터 400년까지 쓴고백론(Confessiones)은 그의 청소년기의 방황, 신에 대한 참회와 찬양 그리고 그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기록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 모니카의 간섭(동거녀 집을 찾아간 사건)과 오직 아들을 위해 순간도 놓치지 않는 기도 덕분에 드디어 33세에 마니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런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76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변방에 머물러 있던 신흥종교인 기독교를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플라톤 철학의 수용 및 수사학으로 무장한 그는 마니교를 비롯한 각종 이교도와의 교리 논쟁과 교리 확립을 위해 노력 등)을 다하였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교회 이론을 정립한 중세 최고, 최대의 교부(敎父, Father)라고 부른다. 그의 철학을 교부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인간의 정신적 성장과 발달의 한계는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아왔느냐를 알면 예측 가능하다. 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Pelagius, 354?~418?, 영국 출신의 영적 지도자) 사이의 대화이다. 대화의 주인공을 찾아보라.

스스로의 금욕을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어. 자신의 노력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어. 노력해봐. 이재부터 죄를 짓지 말고 올바르게 살아 그러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거야!”

천만에 죄를 짓지 않고 살기는 어려워. 성욕 같은 욕구는 참을 수 없는 거야. 인간은 욕망을 자제할 정도로 강한 존재가 아니야. 그저 신의 자비를 구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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