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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행정학] 한국교육사 연구의 관점과 서술의 제문제
작성자 : Edu연구소1   조회수 : 718

한국교육사 연구의 관점과 서술의 제문제

I.

  오늘 논의하려는 내용과 연계될 수밖에 없겠기에 20여 년 전에 서술한 논문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의 역사를 교육사라고 말할 수 있다면, 먼저 교육의 개념을 정리해야 한다. 교육의 의미는 문화적 경험 전체를 포함하는 넓은 범위로 규정할 수도 있고 특정 지식 기능 태도를 학습하는 좁은 범위로 규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교육의 역사 즉 교육사 서술에서 교육의 범위를 제도교육 중심으로만 설정해 온 것은 교육사의 전부를 서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둘째, 교육사에서의 역사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정리해야한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교육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교육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교육의 범위를 의도적 교육행위에만 국한하고 그 역사적 결과를 다루는 것으로 교육사를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적 결과를 초래한 사건들이나 행위들을 그 의도성 여부와 상관없이 교육사 속에 포함시켜 볼 것인가 하는 교육사에서의 사관의 문제가 교육사연구에서 일차적으로 결정해야할 문제다. 쉽게 말해 역사적 문제들에다 교육적 의미를 부여하는 교육사인가 아니면 조직적 의도적으로 수행되는 교육현상에 다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교육사인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 그러나 인간의 모든 삶은 문화적 행위이고, 그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교육이라고 정의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문화적 행위 속에는 교육적 의미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과거의 어떤 문화 속에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즉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교육사의 하는 일이고, 그 연구의 결과를 서술하는 것이 교육사의 서술이 된다.

지난 날의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배우고 가르쳤으며, 그 결과 어떠한 삶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위의 선택을 했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어떻게 성공했고 어떻게 실패했는가, 그들의 성공과 실패가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등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교육의 역사를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 지난 날의 교육의 역사는 반드시 필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넷째, 따라서 한국교육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삶의 역사 속에서의 교육의 의미를 어느 범위로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교육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곧 교육사관의 문제를 분명히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 중 교육사관의 문제는 오늘의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현실 그것이 바로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현상이라고 전제하고 관찰할 때에 어떠한 해석이 나오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 현재 한국인들이 수행하고 있는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성격, 내용, 범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교육은 얼마든지 다르게 관찰되고 이해될 수 있고 그 관점에서 교육의 과거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것이 한국교육사 서술이다. 현재에 대한 해석이 먼저 있지 않고서는 그 현재의 원인이 되는 과거를 보는 관점이 성립될 수가 없는 법이다.

다섯째, 한국교육사 서술방법론상의 제문제는 실증적 교육사서술방법교조적 교육사 서술방법진화론적 교육사서술방법 등 전통적 서술방법론에서 방법론 자체의 문제 못지 않게 사료발굴 정리 해석 같은 기초적 연구역량에서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 삶의 역사로서의 교육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아직 미개척의 영역을 넓게 남겨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육의 역사를 민족의 삶의 역사라는 안목으로 연구하려 할 때에는 민족의 삶 전체의 역동적 과정을 살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민족의 삶 전체의 역사를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하려 할 때에 역사와 문화의 표층에다만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한국교육사연구의 성과를 돌이켜 보면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 왔던 광대한 영역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 들어 한국교육사연구의 관점과 관련해서 갖게된 새로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의 개념설정문제에서 나는 과거에 그 범위를 좁게 설정하느냐 넓게 설정하느냐를 놓고 궁리한 적이 있다. 나는 넓게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제도교육만이 아니라 문화현상 전체를 교육현상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에서나 프라톤의 공화국 같은 서양의 고전에서나 또는 근대 국가 형성기부터의 루소 코메니우스 페스탈로찌 피히테 등의 교육론들, 그리고 최근 콜버거의 인지적 도덕교육론 같은 내용들 속에 일관하는 교육의 궁극 목적은 이상적 사회나 국가를 실현하는데 기여할 인간 양성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동서고금의 교육목적은 개인이 그가 속한 인간 세상(가족 사회 국가 민족 인류)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육을 국가나 사회의 기준에서 보느냐 개인의 기준에서 보느냐의 관점과 기준의 차이에 따라 전략과 방법은 다를 수 있어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봉사하는 인간을 가르쳐 길러낸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인 셈이다. 공자는 인간을 군자와 소인 또는 민()으로 나누어서 교육의 개념을 각각 다르게 규정했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른 의미의 이 실시되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공자의 교육론이라고 생각한다.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교육이라는 단어에서 교라는 말은 공자의 경우 자발적으로 배우는 일이라기 보다 의도적으로 목적에 맞게 가르친다는 의미가 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범모가 교육이라는 개념을 인간행동의 유목적적 계획적 변화작업의 뜻으로 설명한 바가 있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피교육자를 목적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논어의 교와 가까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알고 그랬건 모르고 그랬건 간에 근대국가 이래로 교육은 다분히 논어에 나온 교의 뜻에 가깝게 이해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의무교육이라는 말속에서부터 이미 교육의 강제적 성격은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교육사연구의 관점설정에서 국가주도의 제도교육의 역사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은 적어도 국가 교육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당연한 일일 수 있겠다.

  학습을 교육의 핵심현상으로 규정한 정범모의 견해는 그런 점에서 단어상으로는 옳다고 하겠다. 그러나 과연 한국의 교육학에서 말하는 학습이 몸으로 반복 실천하여 익히는 학습을 뜻하는 개념인지는 매우 의심된다. 왜냐하면 학습의 결과를 확인하고 판단하는 평가의 방법이라고 한국교육학이 개발한 도구들의 대부분이 진위형이나 사지선다형 같은 이른바 찍기행위만으로 끝나는 척도들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실천하는 학습이 아니라 머리로 외우는 암기만으로 학습이 바로 완수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이 바로 한국의 실증주의적 교육학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교육사연구의 관점을 진정한 학습영역에까지 확장하기로 한다면, 교실 속에서 교과서를 배우고 암기하는 인지활동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반복적 실천 내용의 역사까지를 교육과 관련지어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 도덕교과서 속에서 말하는 민주시민의 행동이나 인권존중 같은 교과 내용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했는가를 연구하는 교육사가 아니라, 교실 안팎에서 학생들의 행동이 얼마나 민주적이며 얼마나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가를 교육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그 역사적 변천과정과 양상을 연구하는 교육사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배운 것을 몸으로 실천하여 익히는 과정이 없으면 배움의 기쁨도 즐거움도 없다는 뜻으로 풀어야만 논어의 學而時習之의 교육학적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겠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有朋自遠來不亦樂乎의 경우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의 의미로 보다는 먼 곳에서 몸소 찾아오는 벗이 있음은 즐겁지 않은가의 의미로 이해함이 어떨까 싶다. 自遠來하는 벗, 곧 몸소 실천하는 사람을 벗으로 가진 인생의 즐거움을 말함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몸소 실천함은 바로 이다. 몸을 움직여 먼 곳에서 오는 그 실천을 즐기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듯 싶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육사 연구의 관점을 교육제도사 연구에 못지 않게 교육실천사, 교육행위의 내용과 그 행위의 결과의 실천의 역사를 함께 관찰하고 연구하는 관점으로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싶다.

  교육사 연구의 관점에서 교육의 의미는 따라서 의도적으로 교육하고 조장하는 강제적 교육과 스스로 예를 배워 실천하면서 익혀 가는 학습을 포괄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한 교육의 목적은 의 결과곧 보다 나은 자기로 성장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남과 이웃, 사회, 국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실천적 삶을 살게 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동서고금이 공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런 삶의 실천자를 부르는 이름이 프라톤의 철인군주 수호자, 공자의 군자 민, 맹자의 대장부 등으로 다를 수는 있어도 그들의 실천력품성인격정신을 길러주는 일이 교육이고 스스로 연마하여 체득하는 일이 학습인 것은 같다고 말해도 좋겠다. 따라서 나 개인이 향상 발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성장한 내가 봉사하고 헌신할 보다 큰 것(사회국가)을 좋게 만드는 일이 곧 교육의 의미이고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홍익인간이라는 개념은 교육이념으로서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육사 연구는 첫째, 한국 민족사 속에서 그러한 실천(홍익인간의 실천. 보다 좋은 사회 국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봉사 헌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를 교육의 관점에서 살피고 의미를 찾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민족발생신화 내지 시조신화를 서술한 사람들의 관점과 생각 논리를 살피면서 교육사적 의미를 발견 또는 부여할 필요가 있겠다. 단군신화, 주몽신화 등을 새로운 눈으로 보면 우리는 기록자인 남성 또는 식자층에 의해 윤색 탈락 은폐된 실천적 행위들의 과정(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을 추리할 수 있고, 웅녀유화소서노 등이 선택한 결단과 행위들에 대해 교육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조신화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이주해온 낯선 남성들과 힘을 합쳐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을 지배할 자손을 낳은 원주민이고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홍익인간의 진정한 실천자들이고 주역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 속에는 편린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시조신화와 닮은 실천자로서의 여신들에 대한 신화는 현재까지도 무가로 전승되고 있는 수많은 무조신화들 속에 살아 있다.

  둘째,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에 실려있는 화랑의 교육과 실천에 관한 기록에서 徒衆雲集 或 相磨以道義 或相悅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라고 한 내용 속에 화랑의 교육방법과 내용이 정리되어 있으니, 그 요점은 집단적 교육이었고 실천적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화랑도교육은 바로 이 강조되는 교육의 역사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화랑 교육정신이 실천을 중시한 증거로 삼국유사 권4에 나오는 화랑출신의 중 혜숙의 일화를 들 수 있다. 화랑 好世郞郎徒출신 중 혜숙이 화랑국선인 구감()공의 사냥에서의 지나친 살생을 보고 오직 죽이는 것만을 즐기어 남을 해침으로써 자기를 기를 뿐이니 이 어찌 仁人君子가 할 짓인가,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非吾徒也).” 라고 질타한 행위에서도 화랑교육이 실천교육 곧 을 중시한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교육의 역사를 관찰한다고 할 때에는 이를테면 오늘의 상황에서도 오직 개인의 영달과 자기 무리의 이익만을 탐하여 교육학도 출신인 교육의 수장이 교육동지들을 15백여 명씩 살육하는 것으로써 공을 삼는 행위의 교육사적 의미를 중요한 관심사로 다루고 서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조선사회에서는 비록 국운이 기운 말기적 혼란 상황에서일지라도 상하 신분간의 차별질서를 우주적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존중하는 유교적 예의규범과 원칙을 공공연하게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실증은 양반출신 의병장 유인석이 평민출신 의병장 김백선을 처형한 1896년 사건에서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사적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들의 그런 행위의 실천이 어떤 교육적 원인(배경)에서 연유한 것인가 일 것이다. 유인석의 교육배경과 양반을 능멸한 김백선을 죽인 그의 실천 행위 사이에는 인과율적 설명이 가능할 성싶지만, 김백선의 의병활동과 죽음을 그의 교육배경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오늘날까지의 한국교육학계의 제도교육 중심적 교육관과 교육이론으로서는 그렇다. 김백선으로 상징되는 이 나라 민초들, 동학군 의병 독립군 만세군 등으로 불리웠던 실천적 행위자들,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에 목숨을 바쳐 투신하고 희생되어간 이름 없는 민초들의 실천적 삶의 교육적 배경(원인)을 관심대상으로 삼고 역사를 서술해야만 살아있는 교육사 서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교육사서술에 있어 민족의 문화습속생활을 교육학적 관찰 대상으로 삼고 그 역사를 오늘의 상황과 연계하여 인과관계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넷째, 오늘의 교육의 역사를 보는 눈(관점)과 서술방법에서 의 영역만을 다뤄서는 안될 것이다. 으로써의 현실사회적 정치적 지도층의 행태,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명분들의 실천 등을 냉철하게 비판 분석 서술하는 일 역시 교육사 서술의 과제라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실천과 현실들의 책임을 가르치는 일로서의 교육 및 배우는 일로서의 학의 체제에서 찾고 물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병든 교육현장을 상징하는 왕따현상, 오늘의 병든 우리사회문화를 상징하는 외국인 노동자 천대와 차별, 오늘의 병든 우리 정치를 상징하는 민주정치를 표방하면서 집권한 정권의 부패와 비리 같은 실천적 현실의 원인들 속에서 제도교육의 책임을 빼어 놓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교육사적 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실 속에서의 교육이 남을 위하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을 기르려는 목적보다는 경쟁에서 남들을 앞지르고 자기 자신만 상승하려는 사람을 기르는 목적을 앞세우는 것이 우리 제도 교육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도교육을 만든 이 나라 교육전문가들 또한 교육학이라는 학문을 자기 지위 상승의 수단으로만 보았던 탓에 우리나라 교육학에서는 이 자랄 수 있는 교실 밖에서의 교육영역과 기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만 교육정책을 유도해 왔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한국교육사 연구자들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잘못된 부분들과 관련하여 책임 의식을 갖고 미래를 위한 교육선택의 기준을 새롭게 설정해야 할 듯 싶다.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이 가능한 교육환경이 되도록 우리사회에 대해 자정과 경계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머리로 외우고 입으로 말하기보다는 생활을 통해 실천하고 몸으로 봉사하는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해 교육의 역사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교육이란 결국 보다 좋은 세상 만드는 과정에 동참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실천인 생활인을 양성하는 일이지 많이 알아 남을 앞지르는 경쟁인을 훈련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교육학계는 물론 각 분야 지도층 사람들의 말이나 글의 내용보다 그들의 삶의 실천 내용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고 서술하는 관점 설정과 서술방법의 연습이 필요할 듯하다(김 인 회,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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