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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철학 및 교육사] 삼국시대의 교육 및 교육철학
작성자 : edulab1( )   조회수 : 1717

삼국시대의 교육 및 교육철학

 

1) 시대적 배경 

 

고조선을 비롯한 원시 부족국가 수준의 국가 형태에서 벗어나 고대 민족국가로 발 전하게 된 계기는 불교의 유입과 국가 공인이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시기는 대략 4~6세기경이다. 불교는 국가의 정신적 통합에 반드시 필요한 것 이었다. 삼국이 불교를 공인한 순서(고구려: 소수림왕 372년, 백제: 침류왕 384년, 신라: 법흥왕 527 년)는 각국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는 시기와 엇비슷하다. 유교의 전래 시기는 명확한 기록이 없지만 불교의 수입보다 훨씬 그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2) 고구려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1) 태학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한 해인 372년에 국립학교 태학(太學: 국립대학)을 설립하였다. 태학에서의 교육내용, 교육대상 등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건국한 이래 400여 년 동안 한나라(기원전 206~220년, 중국의 두 번째 통일국가로 유학을 중심으로 나라를 경영함)의 지배를 받아 문화적으로 한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태학제도 역시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므로 태학에서의 교육내용 도 공자(기원전 551~479년)와 그의 제자들의 사상을 체계화한 유학 경전(四書五經: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4서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5경)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삼국에 불 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이미 유교는 정치와 사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것이다. 태학의 교육 대상은 상류계층의 자제였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태학의 설립 목적도 고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여 관리로 등용시키는 것이었다. 

 

(2) 경당 

상류계층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 고등교육기관이 태학이라면 경당(扃堂)은 지방 마 을마다 설립된 일반 대중을 위한 초중등교육기관이었다. 태학과는 달리 교육대상을 한정하지 않았으나 서민 자제와 지방귀족의 미혼 자제들이 주로 입학한 것으로 보인 다. 교육내용도 태학과 유사하였다. 교육목적은 활쏘기와 독서를 강조하여 유사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육성이었다. 

 

3) 백제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1) 오경박사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하였다. 백제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는 고이왕(234~286년 재위) 때부터였다. 그 이후 근초고왕(346~375년 재위)을 거쳐 침류왕 (384~385년 재위)에 와서 중앙집권적 통치이념을 굳건히 하였다. 백제의 교육기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위에 든 세 왕을 거치면서 교육제 235 제9장 한국 고대사회의 교육 도가 성립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285년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 논어, 천자문을 전해 주었고, 375년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에게 서기(백제 최초의 역사서)를 만들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박사라는 직제를 둔 것으 로 보아 교육기관의 존재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백제에는 오경(五經)박사라는 직제가 있었다. 오경박사는 교육관련 관직(예를들면 교수)임과 동시에 유학경전에 능통한 학자를 말한다. 이들은 중앙에 머물면서 관학 에 나아가 오경을 강의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경박사뿐만 아니라 의학, 천문, 지리 등의 다양한 영역에 정통한 전업박사(專業博士)들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 학교제도 

백제의 교육제도나 교육기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관제(官制, 국가기관의 설치 및 조직 등을 정한 제도)를 통해 학교 성립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신차균 외, 2014). 그 근 거로는 백제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그것을 일본에 전수 해 줄 만큼 수준 높은 문화와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학교교육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의 예를 들면, 사도부(司徒部, 학문과 교육담당기관), 내법좌평(內法佐平, 예의범절을 총괄하던 직책) 등이다. 그러므로 백제는 학교교육과 관련된 책임자(내법좌평), 책임부서(사도부), 교육자(오경박 사)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백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학교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4) 신라 및 통일신라의 교육철학과 교육사상 

 

(1) 화랑도의 교육철학 

신라는 별도의 학교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랑도(花郞徒)라는 청소년 심 신수련 단체를 통해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랑도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지 덕 체 를 겸비한 사회지도자급의 인재양성제도로서 6세기 진흥왕(眞興王, 540~576년 재위) 때  중앙정부에 흡수되면서 체계적 조직(원화 또는 국선 ‒ 화랑 ‒ 낭도)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전국의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을 돌아다니며 풍류를 즐기고, 또한 시작(詩作)과 음악, 유희(덕성을 위한 예술활동)를 즐기고, 무예를 닦고(체), 공자, 석가모니, 노장(노자와 장자), 즉 유교(儒) 불교(佛) 도교(仙)의 가르침(花郞의 道, 세속오계)을 화랑과 낭도(郞徒, 화 랑을 따르면서 화랑과 서로의 인격도야를 돕는 사제관계에 있었던 수백 명의 무리)들이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며 익혔다(지).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은 화랑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일컫는다. 이는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충하며(공자의 가르침), 주어진 일을 억지로 하지 않 으며(노자의 가르침), 어떤 경우에도 선을 행하였다.” 

 

(2) 국학 

신라는 김춘추(604~661년,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태종무열왕의 이름)가 648년 당나라에 가서 국학을 참관하고 돌아와 국학(국가가 인정한 현재의 대학에 해당됨) 설치를 위한 준비를 하고 신문왕 2년(682년)에 더 많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당의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국학제 도를 완성하고 통일(문무왕, 676년, 661~681년 재위) 후 본격적인 유교교육을 실시하였다. 국학은 6두품 출신 귀족 자제(15~30세)를 대상으로 9년 동안 수학(修學, 학문을 닦음)하 게 하고(미숙자는 퇴학시킴) 졸업과 동시에 대내마(大奈麻, 벼슬 이름) 17관등 중 10등위 등의 관직을 부여하였다. 국학의 운영은 박사, 조교를 두고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을 교육 하였다. 특히 논어와 효경(孝敬)을 중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통일 후 왕권을 더욱 강화 하기 위해서였다. 신라는 잡학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의학, 법률, 천문학, 건축, 공예, 산학 등의 잡학과목을 두어 국가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해 나갔다. 신라의 건축 이 아름다운 이유는 잡학 교육을 받은 탁월한 공예가와 건축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통일 후 신라 중기 이후에는 귀족 인구의 증가로 관직 부족현상이 빈번하였다. 국학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을 모두 관리로 등용할 수가 없어 양질의 관리채용과 유교사 상의 연구 및 보급을 목적으로 과거제도의 성격을 지닌 국가시험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국학의 학생들을 독서능력에 따라 상 · 중 · 하로 구분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를 설치하였 다. 이 과거제도는 우리나라 과거제의 효시로 원성왕 4년(788년)에 처음으로 실시하였 다. 독서삼품과를 통해 최치원(崔致遠, 857~미상) 등과 같이 유학 경전에 탁월한 실력을 가진 우수한 인재가 선발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신차균 외(2014). 교육철학 및 교육사의 이해. 서울: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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