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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잠시 이 문제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요즘 무엇이건 정의를 내리기는 쉬운 일이 아닐 만큼 세상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무엇인가 정의가 내려지긴 내려져야 우리의 사고가 정리될 것이다.

01
생각하는 갈대
생각하는 갈대

어떤 익살맞은 학자가 철학의 정의를 내려서 “Philosophy is everything and nothing”이라고 한 적이 있다, 과연 철학이 모든 것이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Philosophia 란 어원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sophia가 라틴어로는 시엔시아(scientia)가 되었고, 이 시엔시아에서 science란 말이 나왔으나 그것도 지식을 뜻하는 말에 불과했다. 따라서 모든 지식이 ~또는 지식을 사랑함이~ 바로 philosophy 였다. 이런 뜻의 philosophy 란 말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까지 쓰고 있는 미국의 박사학위 Ph.D 다. 이것은 물론 Philosophiae DoctorDoctor of Philosophy 이지만 결코 철학박사가 아니다. 물리학을 해도 화학을 해도 음악이나 경제학을 해도 그 학우는 Ph.D. 다. 따라서 여기서는 진짜 Philosophyeverything 이던 시대의 유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최근세에 와서는 Auguste Comte 의 역사철학과 같이 신학적 시대, 철학적 시대는 지나가고 실증적 시대(p.4)가 됨으로부터 모든 지식이 세분되어 다른 과학의 이름 속으로 증발되고 마니, 철학은 아무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nothing 이 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익살이 나오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철학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형이상학 metaphysics 을 매장하고 과학만능으로 해결하자는 그런 주장도 사실은 철학이 아닌가? 파스칼 Pascal(1623~1662, 대표작 Pensées)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의 위대와 인간의 비참을 한 마디로 가장 적절히 표현한 말이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비참하나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만은 지극히 위대한,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의 사고를 결정 짓는 몇 가지 방식(way df thinking)만은 어떤 과학에도 속하지 않는 순수한 사색 또는 사변 speculation 의 문제로 남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철학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학에도 사회과학에도 속하지 않는 사변에 관한 지식이란 남아 있는 것이며 사람마다 다 십인십색인 것처럼 사람마다 다 다른 철학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신이 존재한다든지 신은 이미 죽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나, 삼라만상의 근원이 태극 太極이라든지, 물이라든지 흙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나 우리의 지식은 감각으로조차 이루어진다든지, 우리는 형상의 세계만 알 수 있다든지 한 이야기들은 모든 생각하는 존재의 관심사인 동시에 이런 결론들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생활의 좌표를 삼고 있는 것이며, 또한 각자의 행동을 결정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지도원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하며,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그 사람의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신론자가 되어도 좋고, 유물론자가 되어도 좋고, 과학만능주의자가 되어도 좋다. 그것 역시 그의 철학이지 별게 아니다.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도 철학이요, 철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철학이다. 무엇이 논리적이냐는 것을 찾는 것도 철학이요, 무엇이 합리적인 것이냐,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를 찾는 것도 다 철학에 속하는 문제이며, 따라서 아무리 학문이 발달해도 그 밑창에 깔린 철학의 문제, 사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오늘날에 와서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부르지는 않더라도 철학은 언제나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며, “생각하는 갈대”가 살아 있는 한, 생각한다는 문제가 존속하는 한, 철학은 영구히 교양의 입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철학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그 정의는 단적으로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더듬어 봄으로써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02
자기와 세계와의 교차로에 서있는 현대의 특징
자기와 세계와의 교차로에 서있는 현대의 특징

가치관의 혼동, 철학의 빈곤 아니면 풍성, 어쨌든 동떨어지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아무말도 않고 같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의 정의나 분류도 꼭 같은 것이 나올 리 없고 저마다 다른 것이 안될 수가 없다. 그러나 대체로 봐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래 승인해 온 결론이 아마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철학사상 그런 장구한 세월을 두고 거의 반대 없이 승인되어 온 철학 체계(philosophia perennis)는 역시 스콜라 Schola 철학 밖에 없다. 스콜라 철학은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크리스찬 사상의 종합 철학으로서, 전통에 따라 철학을 대별하여 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과 실천철학(practical philosophy)의 둘로 나누고, 철학의 입문 또는 문법으로서 논리학을 들었다. 여기서 사변철학은 그것의 응용 또는 적용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꾸며진 책이 캐스텔(Alburey Castell)의 「근대 철학 입문」 Introduction to Modern Philosophy 이다. 이 책은 1943년에 출판되어 1963년 개정판이 나올 때까지 20년간에 26판을 찍어낸 명저이며, 4반세기를 넘게 아직도 넓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철학 입문서이다. 그는 그런 도식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순수 사변에 관한 철학 문제로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 존재론 ontology (또는 형이상학 meta-physics), 그리고 인식론(epistemology) 또 이상의 세 가지 근본문제에서 나오는 응용철학이라고나 할까? Schola적 표현을 빌면 바로 실천철학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덕철학, 정치철학, 역사철학, 미학을 들고 있다.

결국 철학이란 자기 자신의 존재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존재에 대하여 반성하고, 그 반성고찰한 결과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인간 고유의 무한한 지식욕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지식욕은 인간 세계의 내부에 큰 정신적 긴장이 생길 때에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며 여기서 참된 철학이 나오게 된다. 이럴 때에 철학은 자기와 세계 현실의 존재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날 것이다. 인간 궁극의 결정은 현실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와 세계와의 교차로에 서서 자기와 환경과의 일체 관계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자기의 설 자리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란 일체의 존재와 자체에 대한 체계를 추구하는 성찰인 점에서 그저 보통으로 일상생활의 과학 이전의 생각을 하는 점 또는 일체의 과학적 인식을 하는 점과 다른 것이다. 철학이란 자기의 주관에만 입각하는 개개의 철학자의 일만이 아니라 본질상 철학적 전통을 끊임없이 고려하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시대와 협력하는 사색이라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개개인이 협소한 입장이 어느 정도 극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이랑 전통과의 결합에 있어서 비판적으로 행해지느냐 추종적으로 행해지느냐의 차이는 있어도 문화 전체와 역사적 변천이 무조건적・초시간적 존재근거 또는 생활규범으로써 상대되지 않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이란 바로 각자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우선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는 Sphinx 의 미소에 부딪히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는 자기 반문은 자기와 세계와의 교차로에 서서 일어나는 정신적 긴장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인간 오성에 대한 호소를 해결하는 “제1학” The first learning 이 철학이요 사색하는 인간의 의의와 교양을 붙여 주는 기초과목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철학없이 우리는 “존재”와 “가치”, 진・선・미를 사색할 도리가 없다. 이렇게 살펴볼 때에, 철학은 존재철학 ontology 즉 형이상학 meta-physics 과 사변철학으로서 형식논리 logic 와 인식론 epistemology, 그리고 가치철학으로서 윤리 ethics, 정치 politics, 역사에 관한 인식과 미학 esthetics 등이 들어 갈 것이다. 결국 철학을 “존재”와 “가치”에 관한 사색이라고 생각한다면 존재를 생각하는 부문을 다 순수 이론이 될 것이요, 가치를 생각하는 부문은 말하자면 실천 적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의 사변 속에 신의 존재 혹은 부존재를 다루는 자연신학을 포함시키고, “존재”를 인식하는 “인식론”까지를 합쳐서 하나의 이론철학으로 묶는 방법도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하는 방법이며 앞서 말한 캐스텔의 책이 4반 세기를 넘게 인기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03
Logos의 탐구
Logos의 탐구

철학의 역사란 “존재” 인식의 역사이며 “가치” 인식의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또한 각 개별 과학과 대상 및 방법에 있어서 독립적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실증주의자 콩트 Comte 가 말한 신화적 종교와 실증적 과학의 중간 단계가 철학인 것도 아니요, 또한 개별 과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보충 종합이 철학도 아니요, 심지어는 그러한 개별 과학의 예과 (prep)로서의 사전 사색(anticipation)이 철학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철학의 독립은 또한 개별과학과의 관련을 파기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의 임무는 질서를 붙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진정으로 “모든 과학의 왕”으로서 ahes 과학에 통일과 질서를 붙여 주는 예지이기 때문에 모든 학문의 종합체가 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있어서 일례를 들자면 역사철학 또는 사관(view of history)의 문제가 인생관・세계관을 전연 달리하는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세계를 대립하는 양대진영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실을 보아도 철학의 주요성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철학은 아직도 그 시초 때와 같이 everything 인 것이다. 참으로 철학의 역사는 시종 유기적 세계관(organische Weltanschaung)에 대한 성찰로서 창조적으로 발전하고 보존되어 온 이야기의 계속이다. 정신적・도덕적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뿌리 박혀 있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인도・중국・그리스 등 여러 고대 철학의 유형을 볼 수 있고, 또 크리스찬과 이스람 철학 같은 신학철학을 우리는 상속받고 있으나 모두 자연법과 자연질서와 자연신학에 입각한 유기적 세계관에 대한 성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우리는 서양 철학의 조류와 영향 속에서 제일 많은 감화를 받고 살아온 것은 근대화 과정이란 역사적 코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개인주의적・유물론적・실증주의적・합리주의적・회의주의적 제경향은 다 그 유산상속이지 별게 아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먼저 우주 cosmos를 살펴 보면서 그 불변의 실체・본질・생성의 원리를 캐 보려고 애썼고, 특히 그 법칙 logos을 찾는데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우주에 관한 학문 cosmology 또는 존재론 ontology 등이 나왔고, 모든 학문이 무슨 -logy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의 교차로에 서서 logy 를 찾는 생각하는 갈대의 소산,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 logos 는 먼저 cosmos 에 대한 것이었으나, Socrates(469~399 B.C)는 그 관심을 인간에 집중시켰고 그의 제자 Platon(427~348? B.C)은 인간과 국가를 검토하면서 인간의 욕구를 그의 관념론 idealism 을 통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처리하려 했다. 또 그의 제자 Atistoteles(384~322)는 스승이 형이상학을 계승하여, 논리적・자연과학적 기초와 경험적・비판적 논증과 제한을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개별적인 지식을 촉진시키면서도 그것을 “제1철학”으로서의 존재론 ontology 으로 뒷받침하려 했다. 소크라테스는 저서가 없고 그의 사상은 오직 그의 제자 플라톤의 저작을 통하여 남아 있다. 그 이름은 「대화편」 Dialogues 이다. 여기에 유명한 B.C 399년 아테네 광장에서의 70 노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처단에 있어서의 소크라테스 자신의 「변명」 Apology 이 들어 있고 또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가끔 하는 「심포지움」 Symphosium 이라는 것의 제일 첫 것도 들어 있다. 심포지움이란 본시 「향연」이었다. 그리고 역사상 최고 최호화판의 dinner party 가 아마 이 「대화편」속에 있는 「심포지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인 아가톤 Agathon 의 집에서 만찬을 하면서 아테네 일류의 문화인들이 한 “사랑 Eros 의 찬미”를 주제로 한 방담이었고 거기에는 그리스 3대 희극작가의 한사람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s 도 끼었었으나, 역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향연이 없이 그냥 어떤 주제 아래서 여러 사람이 자기 의견을 발표하는 학술토론을 심포지움이라 부르게 되어다. 또한 이 「대화편」 속에 유명한 철학자의 통치를 요구하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구상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대화의 형식을 취하여 들어 있다. 그리고 천상적인 연애와, 세속적인 연애를 구별하는 소위 Platonic Love 의 이야기도 바로 이 「대화편」에 들어 있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마침내 Logos 의 순교자가 되었다.

04
아카데미의 풍토
아카데미의 풍토

소크라테스를 순교자로 만든 아테네 정치에 실망한 플라톤은 자신의 관직을 집어던지고 12년간 널리 편력의 길을 밟은 다음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B.C. 387년 아카데미 Academy 에 학생을 모아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Academy 란 영웅 아카데무스 Academus 에게 봉헌된 올리브 나무 숲을 말하였던 것이나, 여기서 오늘날 학원을 뜻하는 academy 가 나왔고, 플라톤학파를 “아카데미 학파”라고 부르고 모든 학문적인 분위기를 academism 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플라톤 학원은 A.D. 529년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폐쇄될 때까지 1,000년 가까이 계속된 유럽 최초의 대학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은 Platonism 이라고 불리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상계의 중추를 차지하는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19세기 중엽 미국 문화인의 총수격이었던 시인 철학자 에머슨 R.W. Emerson(1803~82)은 “철학의 역사는 바로 Platonism 의 역사이다”라고 말할 만큼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foot-note 로 성립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이 아카데미 학파의 근본 입장은 이상주의(idealism)라고 부를 수 있다. 사실 아카데미의 풍토라는 것이 소위 현실적인 것에 대한 전투적인 부정적 태도로 그것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현실을 이상에다 의존시키고 종속시키려는 것이 근본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자칫하면 “상아탑” ivory tower 이 조롱을 받고 “현실 참여”가 학원의 풍토인 것처럼 과대선전 되는 수도 있으나 역시 학원의 풍토는 Platonism 이라야 할 것 같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idea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나, 무엇인가 선하고 아름다운 이상을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공통점이고 이러한 이상의 추구 없는 현실 참여만이 학원의 본질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 idea론은 소위 “관념”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개인 및 국가가 최선의 생활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조건이 되는 것이 우선 “제일학”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라는 답변과 같고, 그러기에 역사상 최초의 utopia를 쓴 그의 「이상국가」론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해서 철학자의 진정한 임무에서 그치는 대화를 꾸미고 있다. 물론 플라톤주의는 무엇에 대한 조급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이란 무엇인가?”라는 형태의 질문에 대한 “바로 그것”을 찾는 탐구・노력・동경을 뜻하며, 높은 이상에 대한 동경과 항상 노력하고 탐구하는 격려의 철학이 바로 플라톤 철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아카데미의 풍토는 오늘날까지도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Platonism으로 알려진 사상체계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유별될 수 있다. 1) 철인정치를 요구하는 이상국가의 구상, 2) 천상적 연애와 세속적 연애를 구별하는 독특한 연애관, 3) 학습은 모두 기유 관념의 상기라는 상기설(theory of recollection), 4) “기하학을 모르는 자 들어오지 말라!”는 표어와 같은 수학에 대한 특별한 관심, 5) 전체 universal 를 개체 individual 에 앞세우고, 개체는 전체(보편적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생각(관념실재론) 등이다. 그의 「국가론」은 그냥 단순한 국가론이 아니라 그의 철학의 최고봉이었는데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참으로 무엇이 제일 좋은 것인가? 무엇이 참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 라는 문제는 가장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면서도 가장 알려지기 어려운 것, 그러기에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철학의 제1 과제라는 소크라테스 이래의 생각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인의 통치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안 가진 다수의 국민을, 그래도 진정으로 그것을 생각할 줄 아는 철학자들이 자기 희생을 해 가면서 나라 일을 봐 줄 것을 요구하는 그런 형태이다. 따라서 플라톤 공산주의, 또는 처자의 국유화 같은 엄격성도 오직 철학자인 지배자에게만 요구되는 희생인 줄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그럴 때에 정의가 실현될 것, 그리고 정의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꿈꾸었다.

05
추덕(四樞德, four cardinal virtues,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추덕(四樞德, four cardinal virtues,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그 중 절제(temperance)를 빼면 지 知・ 인 仁・ 용 勇과 같다)를 인간 덕행의 기본으로 삼고, 인간 영혼에 대한 깊은 통찰과 선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정의에 대한 열렬한 소명감을 가진 Platonism 은, 로마제국의 결정이 지난 A.D. 3세기에 플로티누스 Plotinus(205~270)의 신플라톤철학 Neo-Platonism 을 낳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크리스찬 신학가들은 이것을 크리스찬화했고, 5세기의 성인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us(354~430)는 교부들 Church Fathers 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Platonist 가 되었고, 6세기의 최후의 로마인이며 최초의 스콜라 학자인 보에티우스 Boethius(C.480~524)는 「철학이 위안」 Consolatione Philosophiae 이란 로마 사람이 낸 유일한 철학서를 남긴 또 한 사람의 Platonist 가 되었다.

06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리세움의 산책길을 거닐면서 아카데미는 천 년 가까이 계속되었어도 거기서 철학자 다운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 단 한 사람밖에 못 냈다. 아마 그가 너무 위대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20년간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가르쳤던 아리스토텔레스도 스승이 작고하자 이 학원을 떠나 편력의 길을 걷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즉위할 때까지 그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B.C.335년 다시 아테네에 돌아와 아폴로 리케우스 Apollo Lyceus 신전 성역에다 학원은 세우고, 그 성역의 산책 길을 거닐면서 수제자들과 철학을 토론했다. 이 학원을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대해서 “리케움” Lyceum 이라 불렀고, 이 말에서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프랑스의 국립예과인 리세 Lycée 가 나왔고 또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 Peripatetic School 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수학적 이상주의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idea는 말하자면 “현상” phenomena이 아닌 “물건 자체” Ding-an-sich 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생물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전 학문체계의 최고위에 존재 일반과 그 원인을 캐는 제1 철학(meta-physica 또는 신학, 제일 원인은 신이었기 때문에)을 세우기는 했으나, 그것만이 학문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한 학문적 인식이란 주로 연구태도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즉 그 지식이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물의 진상을 알기 위해서 알려는 진리탐구의 소산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학문적 인식인지 아닌지를 경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각도에서 그는 널리 인간 지혜의 소산을 살핀 결과, 제작적 생산적 기술 이외에 관념적 이론적 학문과, 행동적 실천적 학문의 두 가지로 대별했다. 사변 철학과 실천철학의 구별의 시초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이론학에는 존재를 존재로서 연구하는 제1 철학(형이상학 meta-physica)과, 선 line 과 면으로서의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수학과, 자연적 존재로서의 존재를 연구하는 자연학(physica)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실천학이란 인간 행위에 관한 학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인간은 polis 적 동물”이었기 때문에 도시국가 polis 에서 인간 다운 인간 생활을 하기에 필요한 도시국가학 politica 즉 「정치학」과 「윤리학」 ethica 이 실천학이 되는 것이었다. 이 중에도 윤리학이란 시민으로서의 좋은 성격 ethos 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의 유저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homachean Ethics 은 오늘날까지 세 계의 위대한 저술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는 또한 학문 연구의 도구요 방법인 형식론리학의 완성자라고도 볼 수 있으며 삼단논법 syllogism 의 정리를 위시한 그의 논리학은 「방법론」 Organon 이란 책 이름과 아울려 그의 「정치학」과 「윤리학」 만큼 긴 영향을 끼친 학문이 되었다. 동시에 그 사물의 특성에 따라 정확한 분류를 안하고는 못 배기는 천성 때문에, 관념적 사변(philosophia)에서 현실적 파악(historia, 물론 natural history)에 이르는 광범위한 학문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중세 중기까지 플라톤만큼 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논리학」 Organon 은 문법과 수사학 rhetortic 과 함께 중세 교육의 기초가 되던 7 자유과의 하나로 수 많은 학생들이 읽고 간 교과서가 되었고 여기서 “변증법의 시대”(Agr of Dialectic)가 신학을 지배하게 되고, 그래서 1170년 경에는 마침내 파리 대학이 창설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작품들(Physica, Meta-physica, 심리학 강의인 De Anima, Politica, Ethica 등)이 흡수 교육되자, Neo-Platonism 의 권위는 무너지고 아리스토텔리스적인 뒷받침 아래 Schola 학문이 완성되게 되었다.

07
Schola 학문
Schola 학문

Schola 학문을 달성한 것이 13세기의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 St. Thomas Aquinas 였다. 이대한 백과전서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작고한 지 1600년 후에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백과전서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시 소요학파의 찬란한 금자탑을 크리스찬 세계에 세워 주었던 것이다. 이래서 콘스탄티노플(동 로마 제국)에서 파리를 거쳐 코르도바(이슬람 제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아리스토텔레스 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 사상적 제국이 2세기 밖에 못 이어 갔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은 다시 플라톤주의로 생각을 돌려 놓았고, 새 과학의 등장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무시했다. 그러다가 겨우 19세기 말이 되어, 생물학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진화의 이론이 과학의 전면에 등장하게 될 때에, 다시 위대한 자연과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살아나게 되었고, 그와 아울러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도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래서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씨와 날로 엮어져 나가는 것이며, 천상의 이데아 idea 와 삼라만성의 형상 form 과의 관련을 캐는 문제는 영원한 대립 속에서 두 개의 큰 조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철학사의 큰 줄거리가 되었다.

08
플라톤
플라톤

하늘 아래 한 백성이 되려고 영원한 철학 perennial philosophy 플라톤 이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도, 그들이 간 후 4세기 동안은 별로 빛나는 갓이 못 되었다, 그것은 맹자(孟子)와 같은 시절에 살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벌써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종말을 가져온 헬레니즘 세계 Hellenistic world 의 창설자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 때는 이미 “헬라스 Hellas 희랍 希臘의 학교” 아테네의 시절은 지났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Antioch 등 동방의 헬레니즘 세계가 판을 치던 세상이라, 속초(束草0나 정읍(井邑)만한 고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눈에 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가르침이 그들이 간 후 얼마동안 맥을 못 쓰고 있었던 것과 꼭 같다. 그리고 이 헬레니즘의 세계에서 인류사상사에 도 하나의 큰 보탬이 나타났다. 그것은 B.C. 3세기 이후 서쪽 문명세계를 이끌던 스토아 철학파 Stoics 였다. 이 학파의 창설자는 키푸르스(Cyprus)섬에서 난 제노(Zeno) 였고, 스토아(Stoa)란 이름은 이테네 시장거리 북쪽편에 있던 트로이(Troy)전쟁 장면을 그린 벽화가 붙은 화랑의 뜻이었고, 이 장터에서 강론을 시작했다 해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명심할 일은 스토아 철학은 절대로 아테네의 것도 그리스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 심지어는 제노 한 사람이 창설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스토아 철학은 헬레네 사상과 오리엔트 사상의 종합에서 나온 것이었고, 시리아, 소 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지의 고장들과 사람들에 의해서 키워졌고, 로마 제국에 들어와 진짜 로마의 관학이 될 만큼 로마인의 마음을 끈 그러한 세계적인 철학이었다. 따라서 폴리스(polis)적인 철학에서 코스모폴리스적(cosmopolitan)인 사상이 나타나 인류의 사고방식에 새롭고도 큰 “비젼”을 보태 준 것이 스토아 학파이나, 거기에는 뚜렷한 사조도 대표적 작품도 갖다 붙일 수가 없다.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바쁘고 가장 중요한 한 때였던 고대 서쪽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플라톤이즘이 아닌 스토아 학파철학이었고, 이 새로운 “비젼”에서 우리는 오늘날까지 간직해 온 많은 인간에 대한 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도 역시 시대 풍조에 따라 논리학(logica), 자연학(physica), 윤리학(ethica)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점점 전 2자는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물리쳐지고, 윤리학만 과학적 지식이라고 강조하게 되었다. 사변보다 실천이 중시되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의 큰 공헌은 자연과학보다도 인간학에 결정적인 것이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 따라서 인격과 인권의 평등성에 대한 조직적이고 장구한 노력을 통한 설교를 꾸준히 계속한 것은, 크리스찬 이전에는 오직 그들뿐이었다.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인간관계 human relation 란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선행 학파들보다도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과 영혼과 신과의 합일을 믿는 그들의 자연학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법이 도덕이라고 결론을 내린 그들은, 이 이성의 한 분자인 우리 각자는 그 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그 의무를 깨달을 때에, 인간의 법이 존재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이성적 존재의 결합인 사회 안에서, 개별적 이성적 존재인 각 개인은 그 요구를 사회의 욕구에 종속시켜야 하고, 이래서 하나의 법을 가진 한 나라의 시민이 되는 길이 바로 인간의 길이라고 강조한다. 한 하늘 아래서 한 나라 한 백성이 되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은 사해동포・만민 평등주의이 세계인 cosmopolitan 을 꿈꾸기 때문에 항상 좁은 도시국가의 정치 현실을 무시하는 구실을 잘 발견했다. 즉 제노(Zeno) 의 「이상국가」는 가족은 없고, 법정도 화폐도 없고, 학파도 신전도 없고, 모든 민족과 국경의 장벽도 없어진 모든 인간이 다 형제가 되는 그런 국가였다. 헬레네스와 바르바로이(만족 蠻族 p.226)의 구별도, 노예와 자유인의 구별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는 이 세계시민의 관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아 사상을 일관하는 거이며, 하늘 아래 한 백성이 되려는 이 사상은 그 때까지 좁은 도시국가의 감방에 갇혔던 사란들의 마음 속에 확 트인 넓은 새 시야를 열어주는 종교적인 충동을 불러 있으켰다. 사실 스토아 철학은 극히 뛰어난 종교적 관심을 가진 철학이었다. 그들은 범신론 (pantheism)에서 일신론(monptheism)으로 가는 길을 크게 열어 주었고, 그들은 어디서나 법이요, 지배자요 법의 유지자로서의 신을 발견했다. 그들의 자연학은 모든 도덕적 의무에 종교적 뒷받침을 해 주는 기초이론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로마의 다신교 세계에 그들은 비판과 합리주의의 두 가지 관계를 가지고 대했으나 언제나 종합자로서 관용자로서 중재의 역할을 맡았지 편협된 종파주의를 보이지 않았다.

스토아 철학은 로마에 들어가 로마를 일변시켰다. 편협한 국수주의자 로마인들을 세계국가 건설자로 만든 것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은 로마법과 같이 그들을 위대한 입법자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스토아 철학의 덕분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로마 시민법(Jus civile) 에 만민법(Jus gentium)도 자연법(Jus naturale)도 들어갈 여지가 없었고, 이 자연법 사상 없이 로마법이 오늘날까지 생명이 있을 수도 없었다. 폭군 네로 Nero 의 선생이었고 네로에게서 사약을 받은 (A.D 65)세네카 Seneca(천명론 天命論, De providentia)와 로마의 다섯 현명 황제 중의 마지막 철학 황제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121~180, 명상록 저작)는 로마 스토아 학파의 대표인물들이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에는 벌써 현실에 지쳐서 오직 종교적인 우안을 찾으려는 사색이 뚜렷했다. 그로부터 곧 Neo-PlatonismStoa 철학은 그리스도교 속으로 통합되고 흡수되고 말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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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신앙의 조화
이성과 신앙의 조화

A.D. 524년에 “최후의 로마인” 보에티우스가 죽고, 529년 크리스찬 신앙의 통일을 위해서 유스트니안 황제가 아테네의 철학원들을 폐쇄하면서부터 서양은 2세기 동안 정신적 침체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레코・로만 문명의 불씨를 안고 이것을 안 꺼뜨리려 영국 애란섬의 구석에 숨은 수도원들이 필사적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찰스 대제 Charles the Great 의 출현으로 게르만 민족이동의 파도에 휩쓸린 유럽 대륙도 잠간 숨을 돌리게 되었다. A.D 787년 찰스 대제는 모든 수도원에 부속 학교(schola)를 세울 것을 명령했고, 그 사범대학격으로 아헨 Achen 궁중에 왕궁학원을 세우고 영국 섬에서 선생을 모셔 왔다. 이래서 전 유럽에 널리 스콜라(학원)가 번져 가고 여기서 스콜라의 학문 즉 스콜라학 Scholasticism 이 나오게 되었다. 스콜라학이란 서양 중세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는 말로 비단 철학만이 아니라 모든 중세 학문을 다 포함한 말이나, 요기서는 간단히 철학사로만 살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이 학원에서는 7 자유과가 다루어졌으며, 그 초급 3 과 trivium 중에 논리학이 변증법으로 발전했고, 이것을 가르치는 이를 스콜라 박사(doctor scholsticus, 학원의 선생이란 뜻)라고 불렀고, 여기서 doctor란 말이 시작되고, 이 학원이 곧 대학으로 발전했고, 여기서 예과를 마친 bachelor 와, 예과 교사자격을 딴 master 와 대학 교수 docdor> 의 학위가 나왔다. 그리고 doctor와 professor 는 같은 말로 쓰였다. 시대적으로 볼 때에 본래의 스콜라 철학은 9세기에서 15세기까지로, 그리고 학자로 본다면 에리게나 Johannes Scotus Erigena(C. 815~C.877, 영국명 John the Scot, 대표작 「자연구분론」에서 오캄 William of Occam(C. 1300~1349, 별명 무적박사 Docror invinciblilis)까지를 들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스콜라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은 프랜시스 베이콘 Ftancis Bacon(1561~1626, 대표작 「신방법론」 Nevum Organum)의 영국 경험론 철학 experimentalism 과,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1596~1650, 대표적 「방법 서론」 Discours de la méthode)의 프랑스 합리주의 retionalism 철학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 자체도(그 위대한 종합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름을 딴 Thomism 이라고 불리운다) 19세기 후반기 이래 다시 신 토마스 철학 Neo-Thomism 의 이름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어떤 철학가는 중세에는 논리학과 신학 뿐이지 철학은 없다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다. 또 인기 있는 철학사가 듀란트 Will Durant 는 1926년에 초판을 내서 30년 동안 125만 부를 판 유명한 「철학 이야기」 The Story of Philosphy 에서 543면 (포키트 문고판)의 본문 중에 제2장 아리스토텔레스, 제3장 프랜시스 베이콘으로, 중세나 스콜라 철학이란 이름조차 없이 넘어가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철학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학원의 학자들 Schoolmen 은 어떻게 하면 철학을 통하여 신에 도달할까 하고 애썼고(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 philosophia est ancillotheologiae 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성(ratio)과 신앙의 조화점을 발견하려고, 그러면서도 이성과 권위가 충돌할 때에 이성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으로 보고, “유일한 철학자” The Philosopher 아리스토텔레스를 크리스찬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성은 그 자신의 힘과 그 자신의 도구를 가지고 우주의 체계를 사색하는 것, 신앙도 또한 계시도 진리를 가지고 인간 이성을 통해서 인식되는 것, 따라서 그 두 개의 결론이 완전히 배반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콜라 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은 바로 신학 속에서 철학을 찾는 일, 혹은 철학 속에서 신학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이성 운동을 통해서 서양은 “위대한 13세기”에 크나큰 전진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콜라학은 흔히 생각하듯이 지극히 단순한 사색도 아니요 신학철학만도 아니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화만도 아닌 정신사상 가장 발달한 풍성함을 나타내고 있는 하나의 체계였다.

특히 인생에 대한 도로지도를 제시한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1225~1274, 대표작 「신학대전」 Summa Thelogiae)는 제1원인(causa prima)과 시동자(primus motor)의 개념에 철저한 형이상학과, 자연법에 철저한 국가론・사회경제론을 통하여 아직까지도 Neo-Thomism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사유재산의 자연법적 근거, 인격의 표현으로서의 노동, 각자가 직분을 가지고 사회에 주고 받는 직분적 사회질서, 가족의 보좌기관으로서의 국가의 존재이유 등 실천 철학의 분야, 특히 가치의 서열에 대한 중대한 결론 등은 오늘날까지도 쓸모가 많은 사상체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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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관과 세계관
인생관과 세계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나름으로 인생의 도로지도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도로지도를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또 그 도로지도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똑같게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쓰는 이 말의 참 뜻은 무엇일까? 인생관이란 한마디로 생에 관한 견해이다. 일반적 의미로 인생지(Lebensweisheit), 즉 인생에 의의를 발견해 보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인 인생관(Lebensweisheit)이란 무슨 전문적 지식이 아니라, 종교나 세속적 교훈이나 격언 가운데 숨어 있는 인류적 또는 민족적 정신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재나 서적 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인생 가운데서 우러나온 산 철학이며, 몇 대를 이어 내려오는 여러 세 대의 산 경험의 결정이다. 그러면 인생관이란 학문적 연구의 전문분야로서는 널리 윤리학과 합치되는 것, 다시 말해서 철학의 긴 역사를 통해서 신철학이라고 불려온 인간 생활에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 철학이며, 행동과 생활을 위한 철학이다. 따라서 우선 인생관이란 이론을 주로 한 “존재”와 “사변”의 철학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일차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좁은 의미의 “생의 철학”이란 뜻에서는, 모든 존재 · 인식 · 문화창조를 유동하는 생명 또는 산 것에서 이해하려는 철학 경향이 또한 인생관이 되며, 이런 뜻에서는 실천학 또는 윤리학만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생물학적인 의미도 갖는다. 이것은 원자론적 기계론적 유물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하나의 반격인 뜻에서 의의가 있었지만, 이 “생명의 비약”을 말하는 “산 존재”란 체험(erleben)되고 이해(verstehen)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순수 사변철학에 들 수는 없는 가치에 관한 인생관이었다.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서, 개인 또는 인간의 공동체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생활을 어떻게 파악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세계관(Weltanschaung)인 것이나, 이 해석은 생활의 의의해석이다. 그리고 이 의의해석을 통해서 하나의 최고 가치 또는 어떤 궁극적인 여러 가치들이 승인되고, 따라서 그것 혹은 그것들을 실현시킴으로써 생활의 의의와 생활형식의 목표를 발견하자는 것이 세계관이었다.

따라서 세계관이란 궁극적 의식근거로서의 일정한 역사적 인간의 태도와 평가와 결정의 밑받침이 되는 여러 신념 전체를 말한다. 이렇게 이해된 세계관이란 이론이 아니라 세계에 있어서의 생활의 체험과 해석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해석의 노력에 있어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의 문제에 도달하게 됨으로, 인생관과 세계관은 결부되는 것이며, “존재”와 “가치”의 세계에 있어서 철학과 종교의 두 세계에 걸쳐져 있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또는 의식적으로 길러진 정신의 전체적 태도로서의 개인 또는 공동체의 세계관이란 여러 가지 조건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것은 타고난 소질과 유전(인종으로서), 환경과 교육, 경험과 운명, 생활감정과 시대정신, 세계상(세계의 물리적인 인식)과 과학, 신앙과 도덕적 태도 등이다.

특히 각 민족은 기본적인 관념과 판단에서 타 민족과 일치되고 있으면서도, 민족적으로 착색된 독특한 근본적 특징을 가진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자기의 본질적 일반특성과 함께 풍속 · 법률 · 교육 · 문학 · 미술 · 국가 · 민족성 등 모든 표현 중에 보존하면서 젊은 세대에 또한 그것을 전달한다. 전통과 공동체와 결합된 이러한 세계관은 아무리 소박한 것일지라도, 그리고 비록 세계의 근거와 의미 및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이론적으로 변질될 지경이 닥쳐올지라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세계관도 무의식 중에 광범위한 표현형식과 파악형식에 지배되어, 그 형식이 자명 self-evident 한 것으로 나타나고, 문제 제기 그 자체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전 방향제시 pre-orientation 를 받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해석은 나치스적, 마르크스적, 농민적, 자유주의적, 가톨릭적, 이슬람적, 남성적, 여성적, 영웅적, 도박사적, 등등의 세계관의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유형도 나타난다. 그것은 가치의 사열에 있어서 신 · 인간 · 민족 · 국가 · 자연 · 행동 등에 대해서 어떤 힘과 어떤 지위를 인정해 주고 어떤 가치를 부여해 주느냐의 구별이다. 그것은 마음의 능력 평가에 따라 주지주의 intelectualism, 주의주의 voluntalism, 주정주의 emotionalism의 세계관도 되고, 또한 형이상학적 기조와 태도에 따라 낙관주의, 비관주의, 이상주의, 자연주의 또는 실존주의로 된다. 또 인식의 한계 평가에 따라 선험적 a priori, 실증적 positive, 또 불가지론적 agnostic 인 세계관도, 다원론 pluralism, 2원론, 1원론, 유물론, 유심론, 유심론 세계관도, 유신론적, 이신론 Deism 적, 범신론 pantheism 적, 무신론적 세계관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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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서열
가치의 서열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근원과 현상형태를 가진 세계관들은 궁극적으로 불면의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그것들은 다 우리가 비판과 취사선택과 우리 자신의 연마의 대상이 되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에 적합한 세계관이 무엇인가를 우선 알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가치기준이 필요하다. 인간에 적합한 세계관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참된 것이라야 하고, 포괄적이라야 하고, 실천적 의의가 있는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본질적 특징에 있어서 오류와 자기 모순을 안 가진 것이라야 한다. 또한 그것은 어떠한 현실도 인류의 어떠한 큰 문제도 도피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들의 정신적 도덕적 근본욕구의 전체에 대답하는 것이라야 하며, 또한 그것은 우리 생활에 확고한 기초와, 통일적인 방향과 진실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확실한 목표를 주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해서 종교적 신앙과도 합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계관은 선과 가치의 서열을 떠나서 고찰될 수 없기 때문이며, 최고선이란 역시 플라톤이 생각한 대로 천상의 이데아 idea 와 관련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니, 적어도 도덕률이나 양심을 떠나서 그것은 고찰될 리가 만무하다. 특히 개개의 인간은 오직 사회 안에서만 그 능력과 소질을 전개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은 사회에 대해서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 “일반적인 선은 개인적인 선의 위에 있다”고 「신학대전」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반대로 사회는 개인에 대해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는 개인에 대해서 모든 힘의 제공을 심지어는 생명의 희생까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리에도 한계가 있다. 개인의 양심과 개인 인격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파괴할 권리는 사회에 없다. 사회는 개인대해서 죄악행위를 의무로서 부고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나 집산주의 collectivism 의 행패처럼 개인 인격의 말살을 목적으로 삼는 일도 용납될 수 없다. 개인과 사회와의 긴장은 오로지 봉사의 실천으로써만 풀 수 있다. 그 봉사는 개인 인격의 표현으로만 가능하고, 그 인격의 존엄성이 고조되었을 때에 개인은 조국에 대한 자원봉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세계관의 결정은 이성과 신앙과의 합치에 대한 확신,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를 초월하는 만물의 영장다운 인간 영혼의 무조건한 가치 인정, 그리고 물질적인 가치보다도 정신적인 영혼적인 가치가 우월하다는 가치 서열이 인정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러한 가치의 서열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인생관・세계관을 찾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모든 “존재”는 “가치”라고 보는지, 또한 모든 “존재”는 “선”이라고 보는지가 문제의 출발점이다. 존재하는 이상 무엇인가 가치가 있을 것이고, 가치가 있는 이상 “모든 존재는 “선”(omnes est bonum)이란 스콜라적 명제는 맞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가치”의 2원론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무엇에 대해서 보다 더 값 있는 것이냐 하는 가치의 서열이 더 가치있는 것이며, 철학에 있어서,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의 기초와 가치체계가 주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풍성한 이론이 쏟아져 나왔어도 그것은 이론을 위한 이론, 다시 말해서 철학 이전의 변증법의 시대에서 맴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성은 본래의 성질상 자기의 선, 즉 진리를 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가치질서를 인식하는 것도 지성의 자연적인 경향이다. 여기서 가치의 서열을 따지는 몇 가지 기준은 우선 살펴 두자. 1) 수단은 항상 목적에 종속한다. 2) 그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최우선 순위이다(목마른 사람에게 물 같은 예) 3) 경제적 가치는 완전 봉사의 최하위(생활에 부자유란 없으면 되는 것)에 있다. 4) 경제적 가치는 육체적 생활의 건전에 봉사할 뿐이다. 5) 육체적 생활은 인격의 형식적 가치 즉 자유와 존엄성에 종속한다. 6) 인격의 형식적 가치는 인격의 정신적 가치 즉 진・선・미에 종속한다. 7) 일체의 가치는 거룩한 것, 신적인 것에 종속한다. 이러한 서열의 인식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것도 도달하는 과정으로서 인생행로가 파악되고 바로잡혀지지 않는 한, 철학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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