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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앞서 지식의 근원을 찾는 문제에서 “의지의 자유”니 “양심”이니 하는 문제가 나오면 걸리게 되는 지식을 없애버리자는 경향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콩트는 생물학에 양심이 없듯이 양심이 없는 사회과학을, 다시 말해서 선택의 자유가 없는 사회물리학을 만들라는 것이 그가 새로 만든 사회학 sociology 이었다.

그러나 인류사회에서 선악을 빼고 사회생활을 한다면 괴상한 자유(?)만 남을 것이요, 그 자유란 오로지 생리적 자유, 동물적 자유, 또는 본능적 자유, 다시 말해서 길거리를 고성방가를 하고 다닐 자유, 닥치는 대로 때려눕히고 부수는 자유, 아무데서나 마구 용변을 보는 자유, 그런 방종이 자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해서 될 일과 안될 일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앞서 철학의 구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이 선악의 문제는 윤리학의 문제이고, 그것은 실천철학의 문제이다.

위에서 살펴본 자연신학・형이상학・인식론의 구체적 적용이 윤리에도 정치에도 역사에도 나타난다. 우리는 여기서 그 첫 번째의 실천철학을 살펴볼 차례이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좋고 나쁜 이것저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원칙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는 판정을 내리느냐? 도 그 심판자는 누구이냐는 문제를 다루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도 앞서 다룬 모든 순수 사변의 문제가 다 나타나게 된다. 유신론자면 하느님의 뜻에 좇아 사는 것이 선한 것, 거기에 거슬리는 것이 악한 것, 유물론자라면 재물의 불량에 따라 선악이 결정될 것, 현혹은 사람 수에 따라 결정될 것, 회의주의자면 선악이란 알 수 없는 것, 현재 있는 도덕이란 다 집어치워 버렸으면 좋은 것 따위로 나타날 것이다. 그럼 도덕에 대해서 이때까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를 여기서 종합해 보기로 하자.

01
윤리란 하늘의 뜻이다.
윤리란 하늘의 뜻이다.

지금부터 13세기 전에 나온 성・토마스보다도 12세기 먼저 나온 孔子가 한 말이다. 생각이 성・토마스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다 선・악의 원리는 천명 天命에 있다고 생각했다. 孔子는 「論語」에서 “道가 행해지려는 것도 命이요, 道가 없어지려는 것도 命이다.”라고 했고, 또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이 나를 몰라 주는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사상을 이어 받은 「중용中庸」의 저자는 “天命 천명을 성 性이라하고, 성 性에 따름을 도 道라고 하고, 도 道를 닦음을 교 敎라 한다”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 修道之謂敎)고 해서 교육이란 수도요, 수도란 하늘이 준 인간 본성에 따름이라고 했다. 같은 의미는 윤리학을 뜻하는 서양말 ethics 의 어원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말은 그리스 말로 인품・성격을 뜻하는 ethos 란 말에서 나왔고, 이 “에토스”는 또한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란 말을 라틴어로는 mores, 그래서 이 “모레스”란 말에서 모랄 moral 이 나왔고, 프랑스 말로는 이 모랄 moral 이 남성형이면 왕성한 사기를 뜻하고, 여성형이면 도덕이 된다. 따라서 도덕이란 역시 인격, 사기 士氣, 습관, 바꿔 말해서 인간의 본성적 natural 인 것에서 나온 것임을 서양에서도 말하고 있다. 결국 “하늘이 변치 않는 한 도덕도 변치 않는다”(천불변 天不變, 도역불변 道亦不變, 한유 漢儒 동 董(중서 中舒의 말)는 생각은, 천상 최고의 이데아 idea가 선 good 이라던 플라톤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었다. 孔子는 “仁”의 설교자로 인류 최대의 교사가 되었다. 仁이란 두 사람의 관계, 현대식으로 human relation 이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평생 해야 할 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하고 제자(자공 子貢)가 물었을 때에, 孔子 대답은 “그것은 용서함이다. 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기서호 其恕乎. 기소불욕 己所不欲, 물시어인 勿施於人”였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용서해 주는 것은 사랑해 주는 것이고 참아주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 St. Paul 도 “사랑은 어질고, 관인하고, 인내함”이라고 했다. 대인관계에서 인자하고 참고 용서해 주는 것이면 인간된 도리는 다 하는 셈이다. 孔子는 특히 이 “仁”을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효제충신 孝悌忠信의 넷으로 갈랐다. 가정 생활에 있어서의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대인관계를 각각 두 가지씩 묶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나아가서는 맡은 일에 충실하고, 벗과 사귀어서 신의가 있으면, 나는 그가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하겠노라”고 공맹 孔孟은 실천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대학을 나오고, 석사・박사가 되어도 효제충신 孝悌忠信을 모르면 무식한 사람하고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다. 孔子의 길을 좀 더 완성시킨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 孟子는 대인관게 “仁”에다 불붙는 정의감에서 義자를 하나 더 붙여 “인의 仁義”라는 사회정의를 내세웠다. “仁은 사람의 마음, 義는 사람의 길”이란 것이 孟子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하필왈 何必曰 리 利”만 찾소? 人義를 잊지 마시오 하고 그는 전국시대 戰國時代의 제후들에게 호령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머리가 흰 노인들이 길거리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 말게 할 것”(반백자불부대어도로의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을 복지사회의 이상으로 삼았다. 孟子의 교양설은 아마 세계 최초의 교양학부 교과과정을 만든 것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명언이었다. 그는 교양이란 양기 養氣라고 보았다. 기운을 기르는 것이 교양이란 뜻이었다. 적어도 교양이란 “양”자는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호연지기 浩然之氣를 기르는 것, 하나는 야기 夜氣를 보존하는 것, 즉 전자는 남성적인 것, 후자는 여성적인 것이었다. 孟子의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힘차고 강직해서 그를 기르면 천지간에 충만해서 정의와 인도에 투철하고, 이 정의와 인도 없으면 호연지기도 굶어죽는 그런 기운을 말했다. 굳센 의지력과 통제력을 가지면서도 의리에 뛰어나는 이성인이 되는 것, 하늘을 우러러 봐도 당을 굽어봐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것이라야 했다. 이러한 의지의 단면은 주로 스포츠적인 단련, 요새 같으면 수영・등산・스키 같은 것을 통한 천지자연과 친밀히 결합되는 그런 방법이 중시되었다.

야기 夜氣를 보존한다는 말은 밤 기운을 보존한다는 뜻으로 浩然之氣와는 정 반대의 교양을 말한다. 그것은 산과 들에 나무가 자라고 풀이 자라고 하는 자연의 성장과 같이, 마음을 기르는 방법의 하나였다. 즉 낮에는 마소가 가서 풀을 듣어 먹고, 사람들이 낫과 갈퀴로 풀을 다 베어가고, 또 숱한 사람과 짐승들이 쉴새 없이 짓밟고 해서 산천초목이 자랄 겨를이 없을 것인데, 그래도 그것이 다시 소생하는 것은, 밤에 인적이 고요할 때 밤이슬이 이들을 적셔 주고, 숨 돌릴 겨를을 주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로 주야로 짓밟으면 거칠어지고 새싹이 돋을 겨를이 없어 양심이 자랄 수가 없으나, 밥 기운을 보존해서 고요히 잔잔하게 반성하고 마음에 이슬을 주면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본심을 기를 수 있고, 선한 본성이 싹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孟子는 지언 知言과 확충 擴充을 들었다. 知言이란 말조심이었다. 음란한 말, 간사한 말, 편벽된 말, 궁색한 말이 가슴 속에 떠 오를 때는 이것을 억제하라는 것이었다. 擴充이란 인의예지 仁義禮智는 사람이 타고 나온 것이니 그 한 끝을 붙들거든 이것을 확충시켜서 진짜 仁義禮智에 도달하라는 것이었다. 요는 하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 선이요, 그것에 거역하는 것이 악이라는 원리원칙이었음에 변함이 없었다.

02
행동과학이냐? 규범과학이냐? 도덕이란 무엇인가?
행동과학이냐? 규범과학이냐? 도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행동에 관한 연구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이란 여러 각도로 살필 수 있고, 요즈음에는 행동과학 behavior science 이라는 것까지 나와 심지어는 로봇 robot 인간 공학이 행동과학이 되고, 컴퓨터에 먹이는 프로그램 또는 정보제공에 따라서 움직이는 정보과학 cybernetics 이 행동과학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인간들은 여왕벌 아래서 일만하다 죽는 노동벌처럼, 어떤 정보와 지령에 따라 그 정보의 수신기 노릇을 하는 것이 인간 행동인 것처럼 되어 가는 수도 있다.

만일 이것이 대인관계의 전부요 인간행동이라면 정말 세계사는 B.C. A.D.에서 B.C(Before Computor) A.C(After Computor)로 바꾸어져야 할 것 같다. 또 사실 사이렌과 라우드 스피커 소리, 그리고 자동 제어 장치에 의해서 움직이는 공장 노동자들의 행동과학이나, 공산독재정치하의 집산주의 collectivism 생산체제하의 국민생활은 바로 이 행동과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전부가 다 그렇게까지는 안된 모양이다. 컴퓨터가 99.99%의 정확성을 가지고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켰어도 인간의 행동에는 아직도 “가치”평가라는 잉여물이 붙어 다니고 있다. 그래서 행동과학이나 인간공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시 규범과학 normative science 으로서 인간의 “이상”이 문제 되고, 무엇을 했느냐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당위(Sollen, ought)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Sollen 의 문제도 실증주의적으로 도는 자연과학 정신으로 다루어질 수도 있고, 비교 윤리학의 사회학도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간 공간 위에 떠 있는, 말하자면 수 100억의 인류가 반만년의 역사의 길을 걷고도 여전히 밟고 있는 인륜대로라는 공약수가 존재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것의 존재가 규범과학으로서의 윤리의 일체를 성립시켜 준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일은 그리 쉬운 일도 아니다.

대중의 편견 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선각자・예언자들의 고상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버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인류는 孔子, 孟子, 소크라테스, 부다, 예수, 마호메트 이래 아직까지도 꼭 같은 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짜증이 난 니체 Nietzsche 는 크리스찬도 덕자들의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비난하고, 이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 흉내 내는 것 이상 무엇을 했느냐고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윤리의 문제에 관한 한 기묘하게도 동서고금을 통해서, 니체적 사고양식과 비슷한 소피스트 Sophist 적 회의주의적 반발은 그다지 크지 못하고, 역시 전통주의적 가치관념이 아직도 강하게 전 인류에게 붙어 다니고 있다. 그러면 진짜로 인간의 선악을 가리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어떤 이상이 설정되고, 어떤 가치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규범에 관한 문제이지, 그냥 허공에다 대고 제멋대로 한마디씩 소리치며 마구 행동하는 것을 상대로 해석될 문제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러면 이때까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관념은 지극히 높은 최고선,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大學」의 저자가 말한 “지선 至善”에 까지 공통된 이야기였다. 대학교육의 목적을 설정한,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쓰는 “대학”이란 명칭이 만들어진 이 「大學」이란 책에서 내세우는 대학교육의 3대강령은, “명덕 明德을 밝힘, 백성을 새롭게 함, 지선 至善에 머물음”(대학지도 大學之道, 재명명덕 在明明德, 재친민 在親民, 재지어지선 在止於至善)이라 했고, 그 구현방법으로 8조목(치지 致知, 격물 格物, 성의 誠意, 정심 正心, 수신 修身, 제가 齊家, 치국 治國, 평천하 平天下 p.138)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스콜라 철학도 플라톤 이래의 것을 집대성해서 역시 최고선 summum bonum, the highest good 이란 관념을 설정했다. 그리고 孔子의 표현을 빌면 “낙재기중 樂在其中”으로 이 최고선 가운데 행복이 있다고 했다. 이런 주장을 행복론 eudaemonism 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도달목표 또는 이상은 행복에의 도달이고, 인간의 전 노력은 바로 이 행복의 추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행복에 도달한 바른 수단과 그른 수단에 대한 설교를 인류는 내내 계속해 왔다. 물론 행복이란 얻어진 다음의 만족을 뜻하는 것이다. 얻으려는 목표설정과, 얻으려는 노력만으로는 행복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평도 받지만, 그보다도 문제 되는 것은 “누구의 행복이냐?”라는 점이 더 크다. 여기에 대답이 셋이 있다. 하나는 “나”의 것, 또 하나는 “모든 이”의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찾는 것이 “남”을 위한 것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순서대로 이기주의 egoism, 공리주의 utilitarianism, 박애주의 altruism라고 부른다. 이상의 “행복론”에 대해서, 우리가 찾는 최고선이 완전이라는 생각, 다시 말해서 인간은 현세에서 도덕적인 원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선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완전론 perfectionism 이라 한다. “완전론”과 행복론은 어느 정도 비슷한 이야기가 되고, 특히 인간 행동의 결과를 가지고 행복이다 완전이다 하는 점은 어떻게 보면 표현의 차이뿐인 것도 같다. 여기에 대해서 최고선은 의무다 하는 행동의 동기부터 따지는 주장이 있다. 선악의 구별이 행동의 결과에서가 아니라 의무감을 갖느냐 못 갖는냐, 또는 의무를 다할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악이 결정되는 “의무설”의 주장이 그것이다. 결국 선악의 관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문제는 AdamEve 가 선악의 관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문제는 AdamEve 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야기부터, 칸트의 지상명령을 거쳐, Bentham 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까지 수없이 많은 이론을 전개시키게 만들었다.

03
의무는 지상명령이다.
의무는 지상명령이다.

자연신학과 존재론과 인식론의 실천철학인 도덕철학의 문제는 경험론에서 회의론을 거쳐 칸트에 다달아 새로운 국면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의무라는 지상 명령 categorical imperative 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성의 시대, 혁명의 시대에 살던 칸트는 이성에 의한 도덕, 즉 신학에 의한, 하늘의 뜻에 의한 도덕이 아닌 실천이성의 도덕을 찾았다. 그럼 그는 인간이 이성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① 첫째는 순수과학 또는 응용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능력, ② 둘째는 인간이 할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인간 행동을 규제해 나갈 것인가를 알아내는 능력의 두 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썼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도덕 개념 파악에서부터 출발했다. 이것이 흔들리면 그 다음 이론은 다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도덕이란 혹은 덕성이란, 그 내용이야 어떻든,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성적 존재를 보편적으로 구속하는 그 무엇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에 의한 질서라는 것이 동서고금의 모든 인류를 구속하고 있다는 자연법 사상은 스토아학파나 스콜라 철학이나 다 같은 소리며, 석가모니나 孔子나 다 같은 생각이었다. 이것이 2+2=4와 같이 확실한 사실이라면, 그것은 항상 그렇고, 누구에게도 그렇고, 필연적으로 그런 것이다. 또 그것이 사실이라면, 누가 그것을 믿고 안 믿고, 누가 그것을 실천하고 않고 간에 진리인 것, 다시 말해서 그 자체로서 요지부동의 지상명령적인 진리가 되는 것, a priori로 진리인 것, 이것이 칸트의 출발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칸트는 그가 인식론에서 말했던 a priori 를 여기다 적용시키고 category 를 여기다 적용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이성적으로 자연법적 도덕성이 만인에 존재한다면 그 원리는 무엇인가? 그는 여기서 도덕의 정당화를 꾀하는 게 아니라 도덕 자체의 원리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모든 도덕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란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어떤 행위가 도덕이 되는 것은 자기 모순 없이 그것이 보편화 될 수 있는 법칙에 따르는 것, 알기 쉽게 말해서 물리의 법칙이나 화학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보편타당한 도덕의 법칙이 있어서, 그것이 적용될 때만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럼 도덕적 법칙이란 무엇인가? 의무와 선의 good will 바로 그것이라고 칸트는 대답한다. 그리고 이해의 범주(p.98)를 적용시켜 “s는 p다”, “s는 p가 아니다”, 하는 긍정 아니면 부정의 범주를 지상명령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도덕을 지상명령적 실재로 보았다. 그러나 과학과 도덕과 양립시키려던 칸트는 과학에서의 필연법칙을 알면서 어떻게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가?” 또는 “해서는 안될 것인가?” 하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스스로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Sein 도 존재하고 Sollen 도 존재하고 하는 것을 설명하자니 개념이 분명해지기도 하나, 점점 미궁에 빠지는 이론을 면한 길도 없었다. 결국 그의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론은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에 관견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니 Sollen 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Sein 의 세계는 될 수가 없었다. 칸트는 먼저 도덕은 a priori 한 것, 지상명령적인 것이라는 대전제를 해 놓고 여기에 반대되는 도덕론을 배격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이란 하늘이 무너져도 변치 않는 것이라야 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도덕은 감정의 사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어떤 사람의 쾌감・불쾌감으로 도덕이 결정된다면 그것은 지상명령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에 안되는 이론이며, 하나의 행동이 옳기도 그르기도 학 때문에 그른 이론이라고 말한다. 또 도덕은 신학의 산물이라는 것도 칸트는 부정한다.

신학은 윤리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되지만 신을 모르는 국민(그런 것은 실지는 없다)은 도덕이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으므로 그도 보편타당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천벌을 받고 지옥을 가나다는 협박으로 선행을 권한다는 것도 도덕이 될 수 없으니, 협박은 자유의지를 강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실용적인 평가로 결과가 좋으면 선이고, 결과가 나쁘면 악이고 하는 그런 견해도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선 그 자체의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결과를 보고 선 악이 결정되면 그것은 지상명령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도덕을 어떤 행동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닌 딴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 결과를 보고 잰다는 것은 도덕의 a priori 한 성격을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안된다. 다시 말해서 길어지는 힘하고 기럭지를 재는 자하고는 다른 것이 아닌가? 도덕의 원리와 도덕적 요인과는 또 다른 것, 전자는 규범이요, 후자는 자극제인 것이다. 도덕의 본질은 우리 행동이 어떤 일반원리에 의해서 자극되는 일이다. 그러면 그런 일반원리, 모든 의무의 출발점인 일반원리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의무의 지상명령(정말은 범주 명령이다) 이란 어떤 것인가? “오직 너의 뜻하는 바가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하는 원칙 아래서 행동하라”, 이것이 지상명령이다. 자연법칙과 비교해서 이 의무를 설명한다면 “행동 원칙이 의지에 의해서 보편적 자연법이 되도록 행동하라”이다.

따라서 구체적 실천을 위해서 이 번역을 다시 한다면, “너 자신의 것이나 남의 것이나 간에, 인간성이라는 것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삼고 행동하라”이다. 따라서 가장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원리에서 행동하는 일이다. 의무 혹은 Sollen 에 관해서는 그렇고, 그 다음 선의 good will 에 관해서 칸트가 생각한 바를 들어 보자. 의무가 있어도 의지가 필요한 것이고 그 의지는 선한 것이라야 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반대로 선의 good will 없이 선 good 이 있을 수도 없다. 그럼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자 하는 그 의지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자유에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자유의지 없으면 도덕률 없고, 도덕적 책임 없고, 도덕성립의 기초도 없다. 자유 없는 행동에는 의무가 따를 수 없고, 의무란 자유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칸트는 바로 이 도덕성에서 인간은 신을 발견하는 길로 들어간다고 신에게 도덕이 아닌, 도덕에서 신으로의 반대노선을 걸어가 결국은 신으로 귀착되고 만다. 칸트의 이론을 다시 종합하면, 이성적 인간성에서 도덕이 나온다. 그것은 a priori 한 것이고, 지상명령적인 것이다. 그리고 의무와 선의가 그 원리이고, 그것은 자유의지의 소산이고, 자유 없으면 도덕은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선의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 결국 신에 이르는 길이라고 칸트는 풀이했다.

04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천명에 따라 선악이 결정되는 도덕원리에서, 인간 이성의 지상명령으로 결정되는 칸트의 도덕원리로 바꾸자, 그럴 것 없이 도덕이란 인간에 대한 쓸모를 가지고 따져야 된다는 이론이 J.S. Mill 에 의해서 주장 되었다. Locke 와 함께 근대화의 큰 전환점을 제공한 「자유론」의 저자 Mill 은 도한 근대화의 3대원리의 하나인 공리주의 utilitarianism(쓸모주의라는 것이 더 알기 쉽다. 다른 두 가지는 물론 individualismrationalism)의 선교사로서도 유명하며, 그의 도덕론도 바로 이 쓸모주의였다.

19세기 후반기, 인류 역사상 운명의 고비였던 산업혁명 제2단계 40년간(1830~1870)에 활약했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오는 격동기에 대비하기 위한 정치・경제・사회개혁이었다. Mill 부자도 역시 영국에서 Bentham, Malthus, Ricardo 등등 쟁쟁한 인사들과의 사이에서 부패선거구 개정법(1832), 초기 공장법 등과 같이 자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 그들은 사상적 과격파였고, 흔히 공리주의자로 불리우던 패들이었다. 공리주의란 그들이 법이나 관습이나, 제도나, 무엇이든 우선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를 물었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었다. 그 물음에 뚜럿하고 합리적인 대답이 안 나올 때엔 그들은 그것을 말살해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 과격파 사상가들은 무엇이든지 그 뿌리를 캐려 들었다. 뿌리란 말이 라틴어로 radix 였다. 그래서 그들은 radicals 였다. 그래서 그들이 과격파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던진 쓸모란 질문은 바로 이 인간 행복에 쓸모가 있는냐 없느냐였다. 특히 J.S. Mill 은 전력을 기울여 그 뿌리를 캤다. 그래서 그는 「공리주의」 Utilitarianiam 란 책을 썼다. 교육사상 유명한 조기교육을 받은 Mill 은 3세 때 그리스어를, 8세 때 라틴어와 수학을, 13세 때는 Ricardo 의 「경제학원리」 와 Smith 의 「국부론」을 배웠고, 17세 때 벌써 「공리주의 협회」를 창설할 정도였다. 그래서 「공산당 선언」이 나왔던 1848년에 나온 그의 주저의 하나 「경제학 원리」(p.209)는 벌써 사회개량에 의한 자본주의 폐단의 감소와 노동조합운동의 성공을 통한 사회주의사회건설의 불필요성을 강력히 입증하고 있었다. 공리주의란 말이 나올 때에는 물론 Mill 의 선도자 제레미 벤탐 Je-remy Bentham(1748~1832)의 이름과, 프랑스 혁명이 터지던 해에 나온 그의 주저 「도덕 및 입법 원리 서론」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1789)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벤탐을 당수로 하는 이 급진 사상가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관한 최고 심판자이다. 그리고 각 개인은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개인주의).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에게 쾌 pleasure 를 주는 것을 찾고, 그에게 고 pain 를 주는 것을 피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다 이기적이다. 그러면 이런 이기적인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보아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st number 이라는 점으로 밖에 묶여질 길이 없다. 그래서 “쾌락계산”만인 바른 행동을 위한 유일 충분한 길잡이라고 이 공리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벤탐은 네가지 제제 sanction 를 들고 있다.

이 외부적인 도덕적 제제 moral sancyion 란 ① 정치적 제제, ② 자연적 제제 physical sanction, ③ 도덕적 제제, ④ 종교적 제제의 넷으로, 첫째는 형벌의 공포, 둘째는 환경과 생리적 법칙은 사람을 근면하게 또한 절약하게 만드는 것, 셋째는 사회의 칭찬을 얻게 행동케 함, 마지막은 천벌에 대한 공포, 이것들이 사람들을 다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입법과 여론 public opinion 이다. 입법이란 정치적 제제와, 여론이란 도덕적 제제가, 사람들을 사회공동의 이익에 합치시키는 방향으로 이끈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입법과 여론과 교육에 의해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가져 올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끌 수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 공리주의의 골자이다. 이 이론은 적어도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다. 사회의 행복이라는 “쓸모”를 중심과제로 삼고, 진정으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입법, 그리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여론 환기와 여론 존중, 즉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론정치를 하는 것이 근대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모든 교육이 그 방향으로 가고, 또 교육이 다루는 내용과 입법의 내용과 여론의 내용이 합치되는 삼위일체가 성립될 깨에 근대화는 이루어졌고, Mill 의 「자유론」의 공로는 바로 이 점에 있었다. 그 중에도 특히 여론의 자유, 즉 언론・출판・집회・비판・폭로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여론의 양식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과율이란 “자연의 통일성” uniformity of nature 의 확인인지라, 모든 사람은 성격과 동기에서 의지발동의 원인을 갖고 환경과 교육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균등과 교육균등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거의 균등한 업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Bentham 이 말한 바와 같이 이기주의자는 아니라고 보고, “쾌락 계산”이란 분량적인 것만이 아니라, 질적인 우열이 쾌락에도 있다고 보고, 감각적 쾌락에서 정신적 쾌락까지 쾌락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인간은 “동감” sympathy 과 “어진 충동” bene-volent impulse 도 있다고 보고, Bentham 의 4제제 외에 “선의의 내적 제제” internal sanction of good will 를 추가해서, 개인주의적 윤리를 사회적 윤리로 확대 시키려 했다.

05
주인의 도덕 하인의 도덕
주인의 도덕 하인의 도덕

도덕을 결과로 평가하고, 그 평가의 기준이 행복이라는 것이라면 도덕도 참 편리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것은 니체의 주장이다. 이미 자연신학에서 살펴본 “신이 죽었다”던 니체라 도덕도 또한 깜짝 놀랄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초인 superman 의 숭배자였다. 사람은 누구나 다 “권력에의 의지” will to power 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도덕의 근원도 권력에 있다. 황금박쥐의 도덕이 진짜 도덕이고, 그 밖의 인자다 의무다 사랑이다 하는 따위는 다 하인의 도덕, 종의 도덕, 노예의 도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기 쉽게 비교를 해 보자. 가령 정직이란 문제를 생각할 때에, 거짓말을 안 한다, 거래를 바르게 한다, 셈이 흐리지 않다 하는게 옳고 그른 이유가 무엇이냐? 왜 정직한 것이 선이고 왜 부정한 것이 악이냐? 이렇게 물을 때에 칸트 이전 사람들의 대답은 다 똑같이 그것이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또는 자연법이기 때문에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칸트는 아무 이유 없이 그것은 a priori 적으로 지상명령적으로 선이기 때문에 선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Mill 은 그것이 결국에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행복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그렇게 순순히 대답을 하지 않고 “누가 정직이 선이고 부정직이 악이라 하더냐?”고 덤벼들 것이다. 즉 그는 문제부터가 문제가 안된다고 아주 딴 각도로 문제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문화사 연구가였던 니체는, 서양인들이 19세기 동안이나 간직해 왔던 크리스찬 사상보다도 더 위대한 사상체계를 동방 제국에서 발견할 수 있었음과 동시에, 문화 가치는 지방색과 시대성을 달고 다니는 것이라는 큰 발견을 했다. 문화가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문화는 사람마다 고장마다 다 다른 것이다. 도 그것에 대한 가치 평가도 다 다른 것이라, 말을 바꾸면 세상에는 아무것도 영원・절대・부동・불멸이란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 Menschlicher,Allzumenschliches(1880), 「서광」 Morgenrӧte(1881), 「기쁜 지혜」 Frӧliche Wissenschaft(1882)를 연달아 쓰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크리스찬 도덕을 비판하고, 새로운 신에 대한 향수를 표시했다. 그는 크리스찬 도덕, 민주주의 도덕을 약자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노예도덕이라고 통박하고, 강자의 자율적 도덕, “권력에의 의지” Wille zur Macht 를 제멋대로 발휘하는 폭군 네로나 연산군 같은 힘의 과시를 도덕화하고, 이 도덕의 구현자를 “초인” Übermensch 이라 불렀고, 이를 우주의 본체인 “권력에의 의지”의 화신처럼 숭상했다. 독특한 문화사가 니체의 머리 속에 비친 역사의 인상은 언제나 역사의 첫 단계에서는 귀족들이 판을 치는 “영웅시대”가 전개되다가, 그 문화가 늙어가면 장돌뱅이들이 판을 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Homer 의 “영웅시대”가 페리클레스 Pericles 의 소피스트 시대로 바뀌고, 로마의 강력하고 묵직한 사람들의 나라가 나중에는 그 썩어져가는 문명에 물들지 않은 야만인들의 나라로 바뀌고, 마침내는 이 게르만 민족이 19세기의 세계를 서양화하는 고 로마 제국과 같이 되어 가니, 또 과학이다, 예술이다, 도덕이다 하는 부패가, 재물과 안일과 민주주의와 “여성 해방”과 자유주의와 낙관주의로 몰락해 가고 있는 것이라고 니체는 비판했다. 그렇다면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1918)과도 같은 이야기가 되는데, 니체는 바로 이 몰락해가는 현대의 타락 속에서 「서광」 도는 아침 빛을 발견했다. 그것은 진짜의 도덕이란 싱싱하고 힘세고 야성적인 새 문명의 「기쁜 지혜」 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을 비웃는 가치초월의 가치 속에서 고독에 싸인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아름다운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p.59)를 남겼다. 그의 도덕론은 앞에 책에도 들어 있었으나, 다시 정리된 것이 「선악의 건너편에서」 Jenseits von Gut und Bӧse(1886)와 「도덕의 족보」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였다. 그는 도덕의 다양성, 문화성, 역사성을 떠나서 도덕 원리를 논하는 어떤 철학도 이를 배격하고, 그 자신이 “부도덕주의” immoralism 또는 “가치의 초월평가” transvaluation of values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치하려 했다. 그 차이는 오직 한 가지, 즉 이때까지의 도덕이 하인의 도덕이었고, 그가 대치하고자 하는 것이 군주의 도덕 또는 주인의 도덕 즉 초인의 도덕이었던 점이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여성해방이 딱 질색이라, 현대 도덕이 크리스찬 도덕의 산물이라는 데로 결론을 모으고, 이때까지 철학자들이 도덕이란 “주어진 것”이라고 전제해 놓고, 그 “기초 원리”를 찾는다고 바보짓을 하고 있는 모순을 지적한다. 니체는 그렇게 하지 말고, 역사를 읽어보라고 권고한다. 그러면 도덕은 어떤 귀족적 지배계급의 권력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도덕의 족보는 바로 이 주인의 도덕에서 캐야 된다고 그는 확신한다. 그러나 원수도 무찔러지고, 침략자도 없어지고, 안일과 태평이 계속될 때에 이 주인의 권력과 위엄과 횡포와 변덕과 무자비와 엄격은~특히 자녀교육에 대한 엄격, 여자의 정결에 대한 엄격, 수상 수하 간의 엄격, 이 모든 강철 같은 굳은 의지의 실천은~수그러지고, 대중이, 평범이, 병신들이, 약질들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착한”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선인” goodman 이란 친구가 사실은 전 인류의 적이다. 그는 진리를 잡아먹고 사는 친구, 그는 창조할 줄을 전연 모르며, 그는 새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다. 그는 인류의 미래를 매장하는 친구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 중에서 이 착한 사람들이 하는 짓보다 더 큰 재앙은 없다. 왜냐하면 그 선 good 이란 전 인류를 온순한 양떼로 길들이고자 하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강력한 의욕과 본능을 다 죽여 버리는 양 치는 도덕이 도덕인 것이냐고 니체는 가치의 초월평가를 주저하지 않고 한다. 주인의 도덕이 있던 시대는 “선”은 주인의 의사였다. 초인적인 뛰어난 재질을 가진 영웅의 의사가 바로 “선”이었고. “그렇게 해라!”하면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도덕이었다. 주인은 가치의 결정자이다.

그는 가치의 창조자이다. 그는 그의 힘과 의지와 권위만이 무엇을 성취시킬 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성취시켰다. 자신에 대한 자만심,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타인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무관심하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내버려 둘 수 없는 그 엄격! 그 얼마나 장한 초인의 도덕이냐! 그런데 하인의 도덕은 굽실거리는 것, 남을 위하는 것, 봉사하는 것, 바보가 되는 것, 이것이 어찌 도덕이 될 수 있는지? 그런데 이런 것을 제일 부지런히 가르친 것이 크리스찬들이라고 니체는 욕한다. 노예도덕의 대표는 크리스찬 도덕이다. 그들은 도덕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신, 영혼, 죄, 진리, 영생 이것들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것은 노예근성에서 나온 공포감이 만든 거짓말들, 따라서 거기서 도도하고 기고만장인 위풍 늠름한 주인의 도덕이 나올 리가 없었다는 것이 니체의 문화사관이었다.

06
선은 무조건 선이다.
선은 무조건 선이다.

니체의 부도덕주의, 그것은 도덕이 무엇이냐를 묻지 말라고 했다. 그럼 도덕도 죽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덕 원리」 Principia Ethica(1903)를 니체가 죽은 3년 후에 내고도, 55년을 더 살고 85세로 작고한 영국 철학가 무어 George Edward Moore (1873~1958)에 의해서 철저히 논증되었다. 현대 영국 최대의 사상가요, 가장 영향이 컸던 도덕 이론가였던 그는 굉장히 도전적인 이론을 그「원리」를 통하여 펴나갔다. 그「도덕원리」는 거대한 책도 아니었다. 사실 거대한 저작만이 great books 는 아니다.

사서 四書 중의 하나 「大學」이란 책은 겨우 205자의 본문뿐인데도 유교의 4복음서의 하나가 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무어 교수가 쓴 Principia 도 전부 6장 밖에 안되는 간단한 책이었다.(나중에 더 줄여서 「윤리학」을 냈다). 그러나 이 분야에 관한 20세기 저작 중 어느 것보다도 더 많이 인용되는 책이 바로 이 「프린치피아 에티카」이다. 그가 주장하는 근본 이론을 간추려 놓은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윤리학은 판단에 작용되는 원리와 전제를 찾는다. 2) 윤리적 판단이란 두 가지다. 일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이라고 해 두자. 3) 일차적인 윤리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 또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을 다룬다. 4) 만일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온 세산에 그것 하나만 있더라도 그 존재가 없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5) 부차적인 혹은 부수적인 윤리적 판단이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한 무엇에 대한 수단 또는 원인 또는 조건에 관한 것을 다룬다. 6) 본질적 선이란 단순하고, 유일하고, 분석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사상의 질, 속성 또는 객체인 것이다. 7) 본질적 선은 다른 어떤 질과 비교해서 정의하려는 것은 자연주의적 과오다. 8) 일차적인 윤리적 판단이란 자명한 것이다. 만일 참된 것이면, 그것은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그 진리는 직접 이해가 가든지 직관으로 알아볼 수 있든지 하지않으면 안된다. 그 사실은 설명하는 것 이외에 거기에는 증명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9) 그러나 부차적인 윤리적 판단은 그렇지 않다. 10) 일차적인 윤리적 판단은 만일 한 가지에 적용되어서 진리일 때는 필연적으로 무엇에 적용되어도 진리인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판단이고 일반화가 아니며, 보편적 진리이지 일반적 진리가 아니며,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지 일반적으로 진리인 것이 아니다. 11) 그러나 부차적인 윤리적 판단은 그렇지 않고 그냥 일반화이다. 이것이 무어 교수의 윤리관이었다.

물론 말썽이 많은 문제들뿐이다. 어떤 보편타당한 진리, 그 자체로서의 본질적 선이란 무엇인가? 또 그것이 자연적이 아닌 질의 것이라니 어떤 질인가? 또 그것은 정의할 수 없다고 하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정의하려고 애썼는가? 이런 문제점들을 남겨 놓은 채 그는 그래도 본질적 선이라는 개념을 밀고 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윤리적 판단이 성립 안 된다는 것이다. 증명도 필요 없고 분석도 정의도 필요 없는 본질적 선이 존재하지 않는 한 사람이 어떻게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철두철미한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선함 goodness 과 올바름 rightness 을 구별한다. 바르다는 것은 선과 관련시켜야만 정의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그 환경에서 그것 밖에는 딴 어떤 것으로도 선이 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Moore 교수는 말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을 분석하고 정의하려고 들지는 말라는 당부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냐? 하는 본질적인 것이 남는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선하니까 선이다라는 식의 대답 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 우리는 삼라만상 중에 수 없는 절대적 부분들의 고립적 존재를 알고 있다. 그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었으나 그 티끌은 절대적 고립의 존재이다. 선도 마찬가지다. 선이란 역시 절대적 고립 absolute isolation 의 존재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좋다. 왜 좋으냐? 분석을 해 보았자 좋은 점은 다 달아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꽃이 아름다워 보인다. 왜? 분석을 하면 하나도 아름다울 것은 없다. 그냥 아름다운 것 뿐이다. 도덕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공적인 의무, 사적인 의무를 최대한으로 다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수행이 인간 행동의 궁극의 목적이며, 사회진보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분석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본질적인 선이 무조건 존재하는 것이라고 Moore 교수는 주장한다.

07
말과 진리와 논리 도덕이란 무엇이냐?
말과 진리와 논리 도덕이란 무엇이냐?

선・악이란 무엇이냐? 오랜 이야기를 들어 왔다. 그러나 밤낮 제자리 걸음이다. 결국 만일에 무엇 무엇이 이렇다면, 그럴 때에 바로 그것이 진리다라는 말을 모두들 되풀이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말과 진리와 논리」 Language, Truth and Logic(1936, A.J. Ayer의 저서 이름)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착안한 것이 Oxford 대학 교수 아이여 Ayer(1916년생)였다.

그는 19세기 종교에 대해서 신의 사형선고를 내린 니체와 같이, 20세기 철학에 대해서 사형성고를 내린 사람이었다. 그는 형이상학의 추방을 위해서 24세 때부터 유명해진 사상가이며, 26세대에 벌써 오늘날까지도 이름을 날리는 명저 「말과 진리와 논리」를 냈다. 그는 형이상학 무용론자로, 무엇이 무의미하고, 무엇이 유의미하고 하는 문제부터 캐고 들어갔다. 그럼 의미란 무엇이냐? 또는 의미의 기준은 무엇이냐? 우선 우리는 여러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의미하고, 또 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것으로 기준을 찾을 수도 삼을 수도 없다. 따라서 먼저 그 기준을 찾자. 그래 놓고 무슨 뜻이 있다 없다를 결정하자. 예를 들어서 모든 사람이 착하다면 착하고, 모든 사람들이 악하다면 악하고 한다면 그것은 “주어진 것” given 이지 무슨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선 찾아야 할 것은 “의미의 정당화 기준” 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 이다. 그러나 말과 진리를 따져 보니 결국 남는 것은 언어 해석과 논리학뿐. 그래서 소위 논리적 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 라는 철학 타도 운동이 여기서 생겼던 것이다. 물론 “말 뜻 풀이” semantics 와 논리학으로 철학을 잡으려던 논리적 실증주의는 도리어 죽어가던 형이상학을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사용한 방법이 그럴듯했기 때문이며, 그 무기는 역습용으로도 잘 쓰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미의 정당화 기준’이란 또 무엇이냐? 그것에도 모든 사람의 동의가 없으면 무의미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당파로 갈라져 당의 노선에 따라 기준이 틀린단 말이냐? 역시 그렇게 되면 다시 내재관념이니, 주어진 것이니, a priori 니 하는 것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아무튼 도덕원리란 것도 일단 논리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Ayer 교수는 생각했다. 도덕 원리의 논리는 어떤 형태에 속하는가? 모든 서술은 경험적이거나 반복적인 것이다. 그런데 윤리 원칙은 새로운 경험담도 같은 말 되풀이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서술도 명제 proposition 도 될 수 없고, 다만 하나의 유사 명제 pseudo-proposition 에 불과하다. 그럼 유사 명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하나의 심볼 ymbol, 마음 속에 있는 무엇의 표현인 것뿐이다. 그리고 이런 심볼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어, 하나는 인식 심볼 cognitive symbol, 또 하나는 감동 심볼 emotive symbol이라 부른다, 인식 심볼이란 사람이 아는 것 또는 알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데 쓰이고, 감동 심볼은 사람이 느낀 것 또는 느낄 수 있는 것을 표시하는데 쓰인다. 따라서 도덕에 관한 설명은 인식 심볼이 아닌 감동심볼이며, 따라서 도덕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알아서 하는 것도 알 수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닌, 다만 느껴서 하고 느낄 수 있어서 하는 것뿐이라는 감동주의 emotivismAyer 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래서 철학의 세계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곳이 되었고, 오늘날 사회과학도 또한 밤낮 그게 그것인 아이디아를 무시하고 어마어마하고 까다롭기만 하고, 전문가 이외에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새 말 만들기 운동으로 변해 가고 있다. 그러면 감동주의 도덕론의 골자는 무엇인가? 도덕적 용어는 감정은 표시하는 ”말인 동시에, 감정을 일깨우는 말이 된다“고 Ayer 는 말한다. 도덕적 판단의 ”의미 정당화 기준“은 찾을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객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도덕론은 주관론이 된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 주관론이란 비경험적 성격의 명제를 다룬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명제가 전연 없는 심볼의 세계에서 맴돈다는 뜻에서이다. 현실을 다루는 것이 아닌, 말을 바꾸면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닌 환각을 다룬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이래서 Ayer에게는 도덕은 감동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인생도 일장춘몽, 지나가는 나그네 길 밖에 안되는 것, 무엇이 기준이건 찾아 본들 무엇을 하겠는가?

08
양심과 인격
양심과 인격

양심과 인격은 누구에게나 도덕에 관한 철학이야 어떻든, 이 세상 사람치고 자기 정신 도는 양심에 약간의 규칙 또는 명령이 있어서, 이것에 따를 것을 자기 의무로 자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인면수심의 금수와 같은 인간이라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인류의 일원으로서의 자각이다. 여기서 자연적 도덕률이 나오게 된다. 이 도덕률은 내적 연관을 가진 다수의 명령이며, 이 명령은 의무란 명칭 아래 인간의 전 생활을 규제하는 것이며, 이 명령에 위배 될 때에는 악이고 죄고 양심의 가책이고 하는 말이 나온다. 이 명령은 우연적인 임의로 변경될 수 있는 성질의 규정도 아니며, 자연으로 좇아나오는, 또 자연적 필연적 법칙으로서 체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연 도덕률에서 3중의 질서를 요구당한다. 첫째는 당위 Sollen, ought 질서로서 우리 의지에 가장 절박히 호소되는 결과로 복종을 낳게 하며, 둘째는 보다 더 깊은 데 내재하고 있는 가치질서의 인정을 뜻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인간 고유의 가치와 선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 준다. 따라서 자연도덕률은 인간 그 자체의 존재와 결부되는 것, 인간의 존재를 떠날 수 없는 것, ”만일 잠시라도 떠날 수 있다면 길이 아니다“라는 「중용 中庸」 의 말과 같은 소리다. “나”라는 존재는 다만 실재로서의 “본질”만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하는 존재로서 그 내적 본질의 현실화 구체화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일의 주체는 “욕구”이며, 그 일의 대상은 “선”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에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선이다. Hobbes 생각으론(p. 78) “사람은 사람에게 이리” homohomini lupus 였으나, 그런 사회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bellum omniu contra omnes 을 말했으나, “이웃사촌”인 것이 역시 불변의 진리이다. 사실 모든 존재는 가치 있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 그리고 그 자기 실현의 대상으로 다른 존재가 선택될 수도 있다. 그러면 거기에는 인식 또는 사랑이 생긴다. 그러므로 존재와 가치는 분리될 수 없다. 존재는 자기와 타의 욕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치인 이상 선일 수밖에 없고, 가치는 바로 존재의 선성 善性이다. 그러나 가치가 존재의 별명은 아니다. 가치는 존재가 일하는 자로서 욕구를 말할 때만 나타난다. 따라서 가치란 여러 가지 모습의 존재의 욕구 대상이다. 그리고 존재의 정도가 높음에 따라 또 그 욕구의 높음에 따라 가치도 높아진다. 그래서 어떤 선은 다른 선보다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에 인격 가치와 도덕적 선과 같은 무제한의 가치의 서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가치의 서열이란, 말을 바꾸면 여러 존재의 계급 Seinsrang 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민족의 역사적 성공 실패를 통해서 그 존재와 평가가 더욱 잘 인식 되어진다. 역사란 가치평가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완전한 가치질서 작성은 역사의 과업이다. 역사에 법칙이란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다음 사실만은 뚜렷하다. 즉 하나는 ① “구성의 법칙”이요, 하나는 ② “황폐의 법칙”이다. 첫째 모든 가치가 보다 높은 가치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최후에는 최고의 가치를 향하여 실현될 때에는 그 사회질서는 유지된다. 둘째는 얕은 가치가 보다 높은 가치로 향하는 그 질서가 무너지면, “그레샴 법칙”과 마친가지로 가치서열이 전도되어 차례차례로 얕은 가치가 우상화된다. 그래서 마지막 전신 錢神 숭배와 더불어 사회질서는 파괴되고 황폐되고 만다. 여성의 나체가 우상화되는 sex 문명은 바로 그 “황폐의 법칙”에의 좌표이다.

인간에 대해서 그 가치질서의 인식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황폐의 법칙” 에 뒤따라 또 “구성의 법칙”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소질 때문이다. 그 소질이란 인간의 정신적 본성과 인격이다. 인격이란 이성적 존재로서의 독립된 실체를 말한다.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동식물에 인격이 없고, 독립된 이성의 실체이기 때문에 완전히 자각적인 자기 소유, 자기 전진, 자기 목적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은 정신적 본성으로서의 내부구조의 총체가 된다. 인격과 비슷한 말, 때로는 혼동되는 말로 성격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항상 일정한 의욕을 지향하고 있는 경험적인 인격의 지속적 경향성을 말한다. 따라서 성격은 인격의 표현이지만, 의지와 행위에 관한 평가양식이고 의욕의 지속성을 말하는 것임으로 십인십색의 인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도 되고, 점잖은 인격자도 되고 하나, “강한 성격”과 “인격자”와는 반드시 같지 않다. 그것은 그 구성이 3차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① 첫째는 신체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무의식적 존재, ② 다음에는 단순히 감각적 존재로서 의식의 애매한 충동적 생명, ③ 마지막으로 높은 이성적 존재, 이 3차원이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혼합적으로 농도나 긴밀도도 아주 일정하지 않게 결합되어서 성립되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기에 인간에는 항상 어떤 방향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노력 없이는 정상 인격과 정상 성격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 그럴 때에 그 노력의 방향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주는 것은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 행위에 대해서 경고를 발하고, 또 나쁜 짓을 한 데 대해서는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양심도, 형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완된 양심은 도덕률의 요구를 경시한다. 신경과민한 양심은 이유 없이 도덕률의 도덕률의 위배에 대한 공포심만 갖는다. 맑은 양심은 일체의 극단을 피하여 도덕률의 의무를 감각하고 이에 대비한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적인 인격의 표현이란 자연도덕률에 따르는 인간 행위로 밖에 나타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도덕률과 관습과의 구별을 엄격히 해둘 필요가 있다. 자연도덕률은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에 꼭 같이 적용되는 자연법이다.

한 쪽의 절대 “선”이 한 쪽의 절대 “악”이 되는 수는 없다. 불교의 5계나 크리스찬의 10계나, 유교의 3강5륜이나 효제충신 孝悌忠信이나 어느 때 어느 곳에 적용해도 다 절대선이며,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불변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일정한 인간집단의 일정한 문화전통 내에서의 공통적 관습은 도덕이 아니며, 도한 불변의 것도 아니다. 남편 화장 불 속에 뛰어 들어야 미망인의 본분을 다하는 힌두교의 정녀 suttee 제도는 도덕이 아니라 관습이다. 따라서 군주주의 도덕, 민주주의 도덕하는 말은 자연법과 관습을 구별하지 않는 도덕관에서 나온 말이다. 그럼 도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인격과 양심의 표현이다.

09
라마야나의 이야기
라마야나의 이야기

인류 역사의 시초는 영웅시대로 시작된다. Homer 의 시사(epic) IliadOdysey 와 마찬가지로, 같은 아리안 민족이던 인도의 영웅시대 또는 시사시대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Mahabharata 의 두 시사로 시작된다. 이 두 시사들이 준 도덕적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2,000여년을 두고 인도 민중의 최대의 교재가 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중의 하나 라마야나 Ramanyana 의 골자만 소개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B.C.1000~500년대의 이 이야기가 A.D. 2000년대의 인간의 마음에 어떤 감동을 주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임과 동시에, 도덕률의 자연법적 성격, 다시 말해서 “천불변 도역 불변”의 근본원칙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하나의 표본으로 나는 이야기를 여기에 가져오고 싶다.

라마야마는 라마와 그의 왕비 시타의 영웅설화 epic 였다. 라마는 최선의 남성, 시타는 최고의 여성, 그래서 라마는 나중에 인도 민중의 마음 속에 인간으로 태어난 신이란 개념이 요지부동으로 박히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인도인의 의리심에 대한 찬양이다. 아들의 아버지께 대한 의리, 아우의 형께 대한 의리,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의리, 남편의 아내에 대한 의리, 동생들의 형수에 대한 의리, 백서의 왕께 대한 의리, 그리고 벗의 벗에 대한 의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큰 대장부의 말 한마디가 천금의 무게가 있다는 그 의리의 표현, 바로 그것이 라마야나의 이야기다. 이제 그 줄거리를 들어 보자. 아요드햐의 왕은 바르고 고상한 임금이었으나, 연로하고 인자한데다 라마 왕태자와 태자비 시타에 대한 국민의 열성적인 지지도 기쁘고 해서, 원로 회의를 소집하고 라마 태자에게 양위할 뜻을 밝혔다. 대왕의 뜻을 받든 원로들은 환호로 이것을 맞이하고 대관식의 일자를 결정했다. 그리고 서울은 온통 축제 기분에 들떠 있을 때, 왕태자와 왕태자비는 사원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왕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신의 가호를 청하기 위하여 몸을 정결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사스런 여인이 있어, 태자의 이복동생이며 막내인 바라타의 생모인 케이케이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서, 대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케이케이 왕비의 소생인 바라타 왕자에게 마땅히 왕위가 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귀띔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케이케이 왕비는 분노에 가득 찼다.

젊은 왕비는 수 년전 대왕이 싸움터에서 죽을 고비를 당할 때에 몸소 이를 막은 공으로, 무슨 청이든지 다 들어 주마는 왕의 약속을 받은 바 있었으나, 아직도 그 청을 한 일이 없었던 터이라 더욱 분했다. 왕비는 대왕께 이제 그 청을 했다. 그것은 라마 왕태자를 14년 동안 수도자로서 숲 속을 헤메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하고, 그 대신 자기의 소생 바라타 왕자를 왕위에 올려 주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청을 들은 대왕은 슬펐다. 그리고 망신스러웠다. 대왕은 왕비의 발 아래 엎드려 빌며 제발 그 청만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왕비는 대장부 사내로서 또한 일국의 왕으로서 한 말을 어기는 것은 가장 큰 죄임으로 약속을 지켜 주기를 주장했다. 할 수 없이 대왕은 태자 라마를 불러 그 사연을 이야기했다. 라마는 계모 케이케이의 요구를 듣고 슬퍼하지도 노하지도 않고, 부왕의 말씀에 대한 신의의 중요성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희생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즉시 그는 태자비 시타에게 사연을 털어 놓고, 자기는 출가 수도자가 될 것이므로, 시민으로서 새 왕 바라타에게 충성을 다 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시타는 남편의 운명은 아내의 운명이니 어찌 떨어질 수 있으랴고, 자신도 출가 수도자로 남편의 앞장을 서서 갈 결심을 표명했다.

라마 태자는 강력한 항의로 숲속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기다려 줄 것을 간청했으나, 남편 없는 아내에게 무슨 안락과 무슨 보금자리와 무슨 울타리가 있겠느냐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동반하기로 하고, 그들의 재산을 모두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수도의 길을 떠났다. 라마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친 동생 락쉬만도 즉시 형과 형수를 따랐다. 형들이 떠난 소식을 들은 막내 바라타 왕자는 몹시 슬퍼 결코 형의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옥좌 위에 라마의 샌달을 올려 놓고, 그 위에 왕의 권위를 표시하는 백색 일산을 펴 놓고, 형이 출가 수도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다만 섭정으로서 나라를 지킬 뜻을 표명했다. 라마와 시타가 서울을 떠날 때 전 시민이, 심지어는 새들까지도, 멀리 전송을 하러 따라갔다. 다만 나무들만이 아무리 가고 싶어도 너무 뿌리가 땅 속에 깊이 박혀 있어서 전송을 따라가지 못했다. 수도의 길을 떠난 일행에게는 고생이 많았다. 더구나 시타는 악왕에 붙들려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춘향이와 같이 정절을 지켰고, 라마는 잃은 아내를 찾느라고 죽을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 엉뚱하게도 시타가 부정하다는 소문이 돌아 시타는 분신자살을 꾀했다. 그 때 화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시타를 데려가 그의 정결을 증명해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라마와 시타는 다시 만나고 수도 기한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환국의 소식이 오자 바라타 왕자는 뛰어가 형 앞에 엎드려 태자를 맞이했고, 군중들은 하늘을 진동시킨 환성을 올렸다. 바라타는 길거리에서 형의 발을 씻겨 주고, 옥좌에 얹어 두었던 샌달을 신겨 주었다. 이상이 라마야나의 골자이다. 인도 사람들은 아직도 인사를 할 때에 합장을 하고 “람・람”이라고 하며, 라마를 신의 화신으로, 시타를 인도 여성의 귀감으로 삼는다.

3000년 전에 이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나, 3000년 후에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나, 인간의 마음 속에는 같은 느낌을 주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덕의 정의가 무엇이고, 선・악이 무엇이고 하는 논쟁이야 아무튼,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의향은 본질적으로 자연법과 양심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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